『들을 수 없는 것이 어쩌면 한없이 고마운 선물인지도 모르지. 하느님께 감사해요』
한국 화단의 거목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베드로.87)은 자신의 장애, 신앙, 예술을 이 한 마디로 엮는다. 여섯 살 나이에 소리를 잃어버리지만 인간승리의 의지로 한국 동양화의 전통적 정체성을 추구해왔고 '바보산수'라는 독창적 영역을 개척한 운보. 미술평론가 최병식 교수가 3년여에 걸쳐 집필한 소설형식의 평전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는 운보의 인간적인 매력과 삶의 굴곡을 감동 깊게 묘사한 책이다.
최교수는 10년간 운보와 만나고 자료를 고증하며 작가론 연구를 해 오던 중 학문적인 테두리 안에서 담을 수 없는 생생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책을 펴냈다.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극히 일상적인 일화들을 통해 우리는 운보의 면면을 가감 없이 들여다 볼 수 있다.
다재다능했던 소년 운보는 여섯 살 때 고열로 청신경을 잃고 이당 김은호 화백의 사숙으로 들어가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그 후 운보는 입문 1년만에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여러 차례 선전에 입상하며 거목의 싹을 보인다.
한국 근대화단의 대표적인 화백 우향 박내현과의 열정적인 사랑 또한 흥미롭다. 지주의 딸이자 일본에서 활동하던 화가 박내현과 청각장애인이자 가난한 화가였던 운보의 만남은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으로 비춰졌지만 두사람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두 예술가의 '동지적 사랑'은 눈물겹고 애틋하다.
운보의 삶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애인들을 위한 삶. 한국농아복지회를 발족시키고 작품을 팔아가며 장애인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인 그의 철학은 이 책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남을 위한 봉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는 정적인 기쁨을, 봉사에서는 동적인 기쁨을 얻을 수가 있지요. 화가가 예술만을 위해 살다 보면 환쟁이로 전락하지만 봉사가 곁들여지면 정말 예술가가 되지요"
운보의 개종, 현재의 신앙생활, 막내딸이 수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등 신앙과 관련된 내용들도 신자들의 궁금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 김정자 화백이 말하는 스승 운보
“한평생 장애인 돕는 운보의 모습은 인생 스승으로 다가와”
김정자(마리스텔라) 화백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청주 「운보의 집」에 살고 있는 스승 운보를 찾는다. 두 화백은 화단에서 유명한 돈독한 사제지간. 아름다운 인연은 너른 대청마루에 마주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교리나 신앙에 관한 생각들을 나눈다. 운보의 병도 멀리서 찾아온 제자 앞에서는 잠시 사라진 듯 하다.
그림에 있어서는 운보가 스승이리만 신앙은 김화백이 먼저다. 운보의 막내딸 영은 김화백의 영향으로 마더 데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에 입회했고, 이것이 운보의 마음을 움직인 계기가 됐다. 청주에 내려온 이후 운보는 인근 성당에 열심히 나갔지만 이제는 몸이 불편해 가끔 봉성체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서울 애화학교의 전신인 애덕농아자활원 봉사활동은 사제간 인연의 끈을 굳세게 만든 계기였다. 김화백은 『운보 선생님은 농아들을 위해 일하는 수녀님들을 접하며 천주교에 존경과 감명을 느껴 신앙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평생 장애인을 돕는 운보의 모습은 인생의 스승으로 다가왔다』는 김화백의 말은세월이 지나고 모습이 변해도 사제의 정이 희미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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