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보아도 침묵을 지키고/언제 보아도 늠름한 기색이요//바위와 시내들을 거느리고/초목과 금수들을 고스란히 기르오//누구보다도 태양을 일찍 맞이하고/누구보다도 태양을 늦게 보내오//낮이면 구름과 동무하고/밤이면 별들과 남모를 속삭임//네 발은 땅에 있으되/너의 머리는 하늘에 솟았고//내 즐겨 너를 향해 앉음은/깊이 네 모습을 그려 함이요//또 자주 네 품을 찾아 듦은/네 심장의 맥박을 호흡코자 함이요//마침내 네 발 밑에 와 삶은/너같이 항시 묵묵코자 하는 것이오』 (한솔 이효상 선생의 시 「산」 전문)
시인이자 교육자, 인문사상가 그리고 가톨릭 신앙인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한솔 이효상(아길로)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건립됐고, 때를 같이 해 그의 시세계를 집약한 시선집 '가슴이 바위인가' (문학세계사)가 출간됐다.
한솔 이효상 시비건립위원회(위원장=구상, 집행위원장=권국명)는 6월 18일 오후 3시 팔공산 동화사 입구 자연공원에서 경북대 이문호 교수,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등 유족, 친지들과 평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던 교계, 정·관계 및 언론계, 문화계 등 각계인사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비 제막식을 열어 그의 문학과 창작정신을 기렸다. 선생의 손자인 이한범씨가 설계하고 원로 시인 구상 선생이 비문을 쓴 한솔 시비에는 서예가 이홍재씨의 글씨로 대표작 중의 하나인 「산」 전문이 새겨졌으며, 시선집 「가슴이 바위인가」에는 그가 생전에 펴낸 다섯 권의 시집에서 뽑은 「바다」「바위」 「안경」 「성모 마리아」 등 58편이 4부로 나뉘어 실려 있다.
유달리 조국 강산을 사랑하고 그 강산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을 사랑했던 한솔 이효상 선생. 그는 국가 요직에 있었으면서도 순수하고 소박한 시인의 마음으로 언제나 창작과 저술 활동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시집 「사랑」「안경」 등 5편과 「나의 강산아」 「교육의 근본문제」 등 다수의 저서와 「떼이야르 드 샤르텡 전집(전 16권)」 샤를르 뮐러의 「문학과 종교(전4권)」 등을 번역 발간하며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 보였다. 특히 선생은 소외된 이웃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며, 참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 노력이 인정돼 65년에는 서독 1급 대십자가훈장과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그레고리오 기사대훈장을 받았고, 별세시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된 바 있다.
가톨릭신문 창간위원이며 6,7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이효상 선생은 26년 일본 동경대 독문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학업과 시창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28년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에 16편의 시와 여러 편의 산문을 발표한 선생은 「카톨릭청년」 「시원(詩苑)」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광복후 선생은 우리 말과 글과 역사 교재를 만드는 등 국민교육에 앞장섰으며, 미 군정하 경상북도 초대 학무국장에 취임, 일선 교육행정을 직접 지휘했다. 이렇듯 바쁜 가운데도 그는 끊임없이 시작(詩作)을 펼치며 48년 첫 시집「산」을 펴냈고, 동인지 「죽순(竹筍)」등에 작품활동을 하다가 6.25 동란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 대장으로 자유조국 수호에 문인의 선봉이 됐다.
51년 두번째 시집 「바다」를 간행한 선생은 52년부터 경북대학교 강단에 서며 60년까지 문리대 학장직을 맡았는데 그중 2년간은 벨기에 루뱅대학교에 유학하여 현대 유럽의 문학과 철학을 연찬했으며, 54년 세번째 시집 「인생」 55년 네번째 시집 「사랑」 등을 펴냈고, 이외에도 문학평론과 수필 등을 여러 월간지에 발표했다. 60년 4.19혁명 후 초대 참의원에 당선, 국정에 첫발을 내디딘 이효상 선생은 80년 은퇴 때까지 국회의장 등 국가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정에 헌신하면서도, 60년 다섯번째 시집 「안경」 66년 시선집 「나의 강산아」 「문화와 종교」 「교육의 근본문제」를 펴냈고 68년 「현대유럽철학총서(전5권)」를 번역 간행했다. 이후 70년 「한솔 이효상 문학선집(전5권)」71년 「이효상 연설문집」과 「떼이야르 드 샤르텡 전집」 84년 「정치와 종교(전3권)」 88년 샤를르 뮐러의 「문학과 종교(전4권)」들을 번역 출간했다.
한솔 이효상 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 구상 선생은 『이 나라의 현실적 거인이었던 선생과 생전에 우의를 나누고 은고(恩顧)를 입은 친지와 후배들이 추모의 뜻과 정으로 선생이 자주 오르내리시던 이 팔공산에다 돌 하나를 세워 그 드맑은 시심과 전인적(全人的) 삶을 길이 기리며 전하는 바이다』라고 비문에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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