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바닥에 나뒹구는 가련한 어느 여자의 시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서슬퍼런 칼을 막 내리칠려는 망나니, 이런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한 젊은이. 하늘도 이들의 죽음을 통탄하듯 검은 먹구름이 사방을 뒤덮는다.
절두산 최초 순교자 이의송(프란치스코) 가족의 처형 장면을 300호 대형 화폭에 담은 한국화가 청우(晴寓) 허훈(요셉.63) 화백. 이 작품은 9월경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허화백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채 기도하는 마음으로 꼬박 1년을 이 작업에 매달렸다. 때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도 없었다. 죽음 앞에 의연했던 신앙선조들의 장렬한 모습이 가슴에 절실히 와닿았기 때문. 그러면서 자신의 미약한 신앙심에 대해 많은 반성을 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고 저는 붓만 움직인다는 심정으로 작업에 임했습니다. 이번 작품을 만들며 눈물로써 저의 부족한 신앙심을 주님께 고백했어요. 이 그림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으로 순교자들의 굳센 정신을 느낀다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습니다』
그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 관장 배갑진 신부의 요청을 받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곳은 전국 순례객들 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한국의 대표적 성지. 절두산 순교 기념관측은 당시 이곳에서 처형당했던 순교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순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허화백에게 작품을 의뢰했던 것이다. 60년 서울미대를 졸업한 허화백은 77년 일본 미술협회상을 받아 일본 미술계를 경악케 했다. 당시 일본 천황의 동생이 회장으로 있었던 일본 미술협회에서 외국의 한 젊은이가 이 상을 받았다는 자체가 그들에겐 큰 화제거리였다. 허화백은 당시를 회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어 온다고 전한다.
허화백의 작품 한점은 현재 바티칸 미술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83년 당시 한국 교황대사에게 그림을 선물한 것이 계기가 돼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허훈 화백.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교황대사의 의뢰를 받고 84년 120호의 대작을 바티칸에 전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수유리성당과 용산의 당고개 성지에 한국적인 성모마리아상을 그려 증정하기도 했다. 『바티칸의 작품은 무궁화를 배경으로 하얀 모시옷을 입은 한국 여인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붉은 댕기에 태극마크를 넣어 한국적인 이미지를 강조했죠. 제 생애 잊지 못할 작품으로 기억될 겁니다』
그는 이번 작품을 그려 나가며 간절한 소망을 품게 됐다. 바로 이 땅의 모든 냉담자 회두에 앞장서는 것. 허화백은 작업내내 이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도 준비해놓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상본으로 만들어 전국 50여만 냉담자 회두운동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냉담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까지도 마련해 두었다.
『현재 교회내 냉담자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제가 가진 탤런트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이런 생각을 갖게된 거죠. 피로써 신앙을 증거했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순교하는 그림을 많은 냉담자들이 보고 느껴 다시 교회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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