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26일, 나는 사태의 정확한 판단과 사후 원만한 수습을 위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 했었다. 그 전날 최대통령이 광주에서 행한 담화문의 내용이 광주사태의 진상과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가톨릭의료원 원목신부로 의료진과 함께 지원차 광주에 와 있던 김중호 신부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에게 전달됐으며, 6월 초순 주교회의 상임 위원회를 거쳐 주교회의 이름으로 최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물론 비공개였다. 얼마후 편지내용이 유인물로 공개됐는데 아마도 당시 전주교구장 이셨던 김재덕 주교님이 공개하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광주민주항쟁 이후 내게 「광주의 대부(代父)」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광주사태의 진실규명과 원만한 수습, 구속자 석방을 위한 이런 일련의 노력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광주민주항쟁 이후 골프를 치지않는다. 광주에 유일하게 있던 송정리 비행장 골프장에 가려면 공군 헌병대 앞을 통과해야 하는데, 동료 사제들이 갇혀 있는 그곳을 도저히 골프채를 싣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김성용, 조철현 신부가 교도소로 옮겨진 다음에도 『신부들이 감옥에 갇혀있는데』하는 생각에 골프를 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골프를 멀리하게 됐고 결국 골프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광주사태는 지난 20여년간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할 멍에였다. 광주사태에 관한 얘기는 그동안 수도 없이 언급되었지만 내 일생에 있어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이제 민족의 시련이었던 그 일을 민주화에 대한 소망, 인권존중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인권과 공동선의 중요성을 깨닫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교황님께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피해 도시인 일본 히로시마에서 하신 말씀처럼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를 책임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주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가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교구장 재임시에 교도권으로서 분명한 지침을 내린 바 있다. 관계된 이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재조사를 요구하는 모양이다.
당시 우리 교구에선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수년간 충분히 조사했었다. 결론은 초자연적 현상으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메시지도 사적 계시의 근거가 없었다. 로마 교황청에까지 재조사를 청원 하려는 이도 있는 모양인데,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것은 교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미 교황청과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광주대교구장 은퇴에 대한 소회와 사제들에게 주고 싶은 말로써 나의 회고록 아닌 회고록을 맺을까 한다. 교회도 행정적이고 조직체이지만 주교는 일반 사회적 소임과는 다르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과 뜻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또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는 이 모든 일을 그저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적인 부족함을 한없이 느끼지만 『하느님께서 불러주시고 은총으로 이끌어 주시리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교구장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주위 신부님 들이 신앙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다. 새로운 교구장님이 오신 것도 교구로서 새로운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나의 퇴임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일치한다면 지역복음화라는 지상 명제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교구 사제단에게는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일치하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사제단이 일치할 때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화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했으면 좋겠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증거할 때 지역 사회속에서 교회의 본 모습을 찾을 것이다. 복음의 빛이 되는 교구,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50여년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신앙생활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성서말씀처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매일의 생활속에서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깊은 신뢰, 그러한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항상 기도하며 살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지나온 일생을 함께 더듬으며 기도해준 독자들과 모든 신자들에게 축복을 전하고 싶다.
다음주부터는 서울대교구 은퇴사제인 장대익 신부님의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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