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1821~46), 최양업(1821~61) 탄생 180주년을 맞아 양업교회사연구소(소장=차기진)는 1월 중순 중국 상해, 홍콩, 마카오, 필리핀 마닐라 등지의 서품과 유학 장소, 고난의 피난지, 귀국로를 핮기 위해 노력하던 길 등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순례하였다. 동갑이고 동향이며 동창인 두 사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분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특히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에 필ㅇ한 자발적인 현양운동을 펼친다는 깊은 뜻이 있었다.
상해 서가회성당
청주교구 류한영 신부(배티성지 주임)를 단장으로 한 순례단 16명이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최양업 신부의 수품장소인 상해교구 서가회 주교좌성당.
중국 개교(1603) 5년후인 1608년 명말의 문신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그의 향리 서가회에 천주당을 세우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개교 60년이 되었을 때 상해의 신자수가 4만명을 기록했고(성당 2개, 소성당 16개) 18세기초에는 8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가회 주교좌는 예수회가 세 번째로 지은 성당으로 문화혁명 때 첨탑 등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1979년 다시 문을 열면서 전체를 보수했고 성당 옆에 새로 증축하고 있는 신학원 건물은 완공단계였다. 신학원은 1847년 예수회 선교본부로 건립한 것인데 최양업이 마레스카 강남교구장으로부터 사제품을 받기전 신학공부를 계속한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의 수품(1849년 4월)은 김대건 신부보다 4년 가량 늦었다. 서품권을 가진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최양업은 조선땅에 들어가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번번이 좌절된다. 1847년 여름 라 피에르 군함을 타고 귀국길을 탐색하던 중 배가 고군산도 부근에서 난파하자 최양업은 섬에 상륙하여 남고자 하였으나 함장이 거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다.
류한영 신부는 강론을 통해 좬그 때 최 신부님이 입국에 성공했더라면 틀림없이 순교하셨을 것인데 12년 동안 교회의 중추를 놓게 된 은총으로 봐야 한다좭고 말했다. 최양업은 수품 후에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를 통한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상해로 다시 왔다가 요동반도로 가서 성무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최양업은 최초의 해외선교사다.
금가항·횡당성당, 서산수도원
김대건 신부의 수품장소 금가항성당은 오는 3월께 폐쇄토록 되어있다. 중국 사람들은 양자강을 용에 비유한다며 금가항이 속해있는 포동특구는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문 자리라 해서 황포강변 중에도 이 지역에 첨단산업 고층빌딩을 즐비하게 세우고 있다는 신의식 교수(한성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유적 표지판이라도 어딘가 남게 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가항에 이어 김대건 신부가 첫미사를 집전한 횡당(橫塘, 중국어로 왕담)성당도 순례하였다. 상해 송강구에 있는 이 성당은 당초 서쪽 2㎞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문화혁명 이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순례단이 다음 찾아간 곳은 역시 상해시 송강구의 교구 신학교가 있는 서산수도원으로 야트막한 산 전체가 공원으로 꾸며져 풍광이 그윽하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신학교를 거쳐 정상의 성모성당까지 대나무숲 오솔길을 따라 갈지(之)자 모서리마다 세운 14처가 인상에 오래남았다.
홍콩, 마카오, 마닐라
다음 순방지 홍콩 마카오 마닐라는 필자의 경우 1987년에 이어 두 번째다. 그 때는 김대건 신부 얘기만 들었으나 이번에는 사전답사한 교회사 연구팀의 해설과 안내를 통해 두분을 함께 더듬어가니 더욱 뜻깊은 순례가 되었다. 대개 홍콩은 마카오 가는 길목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최양업이 부제 때 해로탐사를 기다리면서 기해겫늉?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한 곳이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옮겨온 홍콩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장소는 빌딩 속에 묻혀버렸지만 선교단체들이 보호권을 찾아다닌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였다.
조선 신학생들은 의주변문을 거치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서울 출발 7개월만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세 소년이 남하한 길은 조선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가 마카오로 입항하여 복건성, 남경 산동성, 북경 산서성, 요녕성, 서만자로 북행한 길을 되짚어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차기진 소장의 설명이었다.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자리는 카모에스 공원 바로 앞인데 지금은 아파트로 변해있다. 그 옆의 안토니오성당은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자주 들렀을 것이니 160여년전 일이 새롭게 다가왔다. 공원안의 밑둥 굵은 나무를 골라서 쳐다보곤 하였다. 5년반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무 밑을 거닐며 향수에 젖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1839년 4월 두 신학생은 몇몇 스승 선교사들과 함께 아편으로 인한 소요때 필리핀으로 피난했다가 그해 11월 귀환하였다. 처음 한달간은 마닐라 시내 도미니코수도회에 머물렀고 나머지 5개월은 마닐라 외곽 롤롬보이에 있는 수도회 농장에서 지냈다고 한다. 별장 겸 농장 터는 주택가로 변했지만 집주인은 신자 가족이어서 교회사적지로 터를 내놓았고 아주 매각할 뜻을 비쳐 다행스러운 일이다.
김대건 성지로 조성된 집안에는 오래된 망고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는데 두 신학생은 그 나무 밑에 앉아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었다 해서 망향의 망고나무로 불려진다.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과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아들 신학생들이 롤롬보이에 머물 때인 기해년 9월 11일과 26일 각각 순교하였다. 두 신학생이 눈물로 읽은 부친의 편지는 유서가 된 셈이니 망고나무를 어찌 무심히 지나칠 수 있으랴.
순례자는 마닐라 주교좌 성당과 어거스틴 성당에서도 이곳 미사에 참례했을 두 분의 영상을 그려보곤 하였다. 소서양(小西洋)으로 알려진 마닐라 피난을 통해 다른 수도회와 접촉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최양업과 김대건의 시야는 매우 넓게 트였을 것이다. 선교단체에 따라서는 문화적응주의를 채택하는가 하면 엄격 일변도로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니 소서양 체험은 특히 최양업 신부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목 자산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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