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눈 내리는 1월, 운보(베드로)는 귀천했다. 끝없는 실험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불살라온 예술혼만 남겨놓고서 그는 영원히 붓을 놓았다.
영원히….
60여년 동안 한편의 드라마 같은 그의 삶의 굴곡을 거짓없이 화폭에 담아낸 운보. 젊은시절에는 생계를 위해, 노년시절엔 장애인들을 위해 그리고 아내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8000여점의 그림을 그려냈다. 어린시절 후천적으로 청각을 잃었던 운보가 그림을 대한 것은 16세때. 신여성인 어머니 한윤명 여사의 손에 이끌려 당대 최고화가 이당 김은호 문하에 들어가면서 그는 화가 김기창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31년 18세때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섬세한 묘법을 구사했고 50년대 동양화 고유의 필선과 수묵의 정서에 바탕을 둔 그의 필법은 운보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운보는 아내 우향 박래현과 사별한 뒤 그리움에 젖어 바보산수를,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청록산수를 그리며 또다른 예술세계를 펼쳤다.
일찍이 50년대 예수의 생애 30여점,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그린 운보는 막내딸 영이 수녀(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되면서 85년 천주교로 귀의,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말기에는 2만3000호 짜리 대형 걸레그림으로 점과 선시리즈를 만들며 마지막 남아있는 그의 예술 에너지를 불태웠다.
구상과 추상,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들면서 변신해온 그는 인물, 꽃과 새에서 청록산수, 바보산수, 현대적 풍속도, 추상적 작업까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한국 현대화단의 거목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운보가 우리 가슴에 남긴 또 하나의 흔적은 장애인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노력이다. 그는 낙후된 국내 농아복지시설을 개선하려고 힘썼으며 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를 창설했고 청음회관 건립, 농아자들을 위한 운보공방 운영 등 예술정신을 장애자들에게 삶의 의지로, 사랑으로 전했다. 예술과 장애인에 대한 거대한 삶은 그에게 좥천연기념물좦 바보인간 이라는 이름들을 남겼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미수의 생애동안 맘속에 간직해온 운보는 소원을 풀었다.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동생 기만과 50년만의 해후다. 병고로 말없이 통한의 눈물만 흘렸지만 운보에게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이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던 운보. 백의민족의 정신을 드날리기위해서라며 병상에서도 흰 고무신에 빨간 양말을 고집한 김기창. 마무리 짓지 못한 그림들이 기다리는 그의 작업실에서 작은 메아리가 이어진다. 나에게는 오늘이고 내일이고 없어. 눈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 아직도 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 되는데 말이야…
■ 운보 연보
▲1913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 출생
▲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화백 문화 입문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서 「판상도무」입선 데뷔
▲1946년 동교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
▲1952년 예수 일대기 다룬 30여점 제작
▲1955년 대작 「군마도」와 「탈춤」시리즈 제작. 홍익대 강사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 회화과 학과장
▲1976년 부인 우향 타계, 바보산수 제작
▲1977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
▲1984년 충북 청원군에 「운보의 집」완공
▲1985년 가톨릭으로 개종,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세례받음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서 「운보전」
▲1993년 예술의 전당서 팔순기념 대회고전
▲1994년 운보 전작도록(전5권) 발간
▲2000년 갤러리 현대 등에서 미수 기념특별전. 북한의 동생 기만씨와 상봉
▲2001년 선종
■ 고유미술의 금자탑 - 운보 김기창 화백 영전에 (구상)
하늘의 섭리런가 청각을 잃으시고
한편생 그림으로 만물의 진수(眞髓) 그려
이 나라 고유미술의 금자탑을 이뤘네
체구는 장대하나 숫되기가 소년같아
만나는 사람마다 허울 벗게 하셨으니
가시매 그 예술 그 인품 더 기리고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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