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상 최초로 평신도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에 의해 이룩된 교회, 주교나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교구로 먼저 설정되고 선교사들이 파견된 교회….
세계교회로부터 숱한 칭송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이런 역사적 실존, 그리고 위상은 실로 피로써 이 땅에 믿음의 씨앗을 뿌린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없었으면 감히 부여되기 힘든 은총이다. 그러나 그 칭찬의 주역인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정신, 나아가 순교선조들이 피를 뿌린 좥신유박해좦라는 신앙의 들녘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가고 있다.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박해의 현장에서 명멸해간 순교선조들의 신심을 되살리고 때맞춰 새롭게 불붙고 있는 이들의 시복시성운동에 발맞춰 나가고자 한다. 이에 신유박해의 역사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스러져간 순교선조들의 삶의 면면 등을 조명하는 다양한 특집을 통해 신유박해 순교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는 길에 함께 하고자 한다.
1801년 신유박해 등 한국교회에 가해진 박해는 전근대적인 사회질서의 해체 시기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신분질서 체제를 무시하는 등 서학도들의 행위는 그 파급력과 아울러 조선 사회에 반체제적 요소로 인정됐다. 신유박해를 단적으로 요약하면 사회 변혁의 지향을 지닌 서학도와 조선 조정 사이에 야기된 긴장과 대립관계가 당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이른바 사학이라는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헐어 없이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으로 돌아가게 한다. …잡아서 뉘우치지 않는 무리가 있거든 반역죄로 다스리라. 수령은 각각 그 맡은 바 지방에서 오가작통법을 밝게 실시하여…사학의 무리가 있거든 곧 관에 고하여 죄를 다스려 사학을 뿌리째 없애버려 남은 씨가 없게 하라. 서울이나 시골 할 것 없이 고루 알도록 하라
당시 조선 조정이 공표한 천주교 금지 교사는 천주교에 대한 지배층의 인식과 대응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의 세력확장과 선진문물을 먼저 배운 일본의 성장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조선 말기 지배계층에게 천주교는 사회의 구조는 물론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갔다. 남녀와 반상(班常)의 차별이 가득하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벽을 허물고 모두가 하나되어 나눔과 섬김의 사회를 이뤄가던 천주교 신자들의 삶은 분명 혁명이요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시 천주교의 빠른 전파 속도는 지배층의 위기감을 낳을 만했다. 1784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지 10년만인 1794년 즈음에는 이미 4000여명의 신자들이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신자 수는 1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도로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이런 이유로 조선 조정의 외세에 의한 위기감이 천주교도들이 꿈꾸는 사회로 인한 내적 위협으로 증폭됐음직하다.
이 가운데 천주교에 대해 온건책을 써온 정조가 1800년 7월 49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함으로써 당시 정치세력들간에는 잠시동안 역관계의 공백이 생긴다. 이 공백을 비집고 들어선 지배집단이 당시 당쟁의 한축을 이루던 대왕대비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벽파였다는 사실에서 박해의 씨앗을 엿볼 수 있다. 정순왕후 김씨는 시파(時派)의 주축을 이룬 천주교도를 뿌리뽑으려 한다. 표면적으로 신유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김 대비의 오빠인 벽파(僻派) 김구주의 유배라는 묵은 원한에 있었다. 여기서 비롯된 박해는 권력을 잡은 벽파와 노론이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원한을 풀어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도세자와 정조를 해치려던 벽파와 온정적이던 시파의 당쟁이 결정적으로 천주교 박해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렇게 천주교와 당시 지배세력의 충돌로 나타난 신유박해는 기존 권력층 내의 권력재편과 맞물려 있었다. 본격적인 박해는 정조의 국상이 끝난 직후 최필공(토마스)의 체포로 비롯된다. 이를 필두로 그의 사촌동생 최필제(베드로)와 서울 회장 최창현(요한) 등 많은 신자들이 잡힘으로써 한국교회사의 첫 공식 박해가 시작된다.
조선 정부는 1801년 2월(음력 정월 10일)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에 따라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 했다. 박해령이 내려진 지 한달여 사이에 이가환, 홍낙민, 정약용,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등이 체포돼 박해가 가열된다. 마침내 4월 8일(음 2월26일) 신유박해 최초로 정약종과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이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되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하며, 정약용과 정약전 등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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