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은 최근 두 번의 뜻깊은 잔치를 가졌다.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피천득 선생과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의 구순잔치가 지난달 15일과 24일 마련된 것. 70여년이 넘는 외길 문학인생과 맑고 고결한 인품에 수백 명의 후배와 제자들은 머리숙여 축하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두 선생의 댁을 찾아가 만나보았다.
구순의 나이에도 영원한 「동심」을 지니고 사는 이들이 있다. 얼마전 구순잔치를 가진 수필가 피천득(프란치스코)선생과 아동문학가 윤석중(요한)선생이 그렇다. 이들의 머리에 내려앉은 흰 머리칼은 긴 세월의 남루함과 노쇠함을 넘어 깨끗이 가꾸어 온 순백의 영혼을 드러내주는 듯 환해 보였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하는 「수필」, 또 「인연」「플루트 플레이어」등 마음을 맑게 하는 샘물과 같은 작품을 발표해온 피천득 선생.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문학소녀들이 암송하다시피 한 그의 글은 과작(寡作)속에서도 일반인과 후배 문인들에게 20세기 명문장으로 칭송받고 있다.
『저는 다작에 욕심부린 적은 없습니다. 뭐든지 정말로 잘된 것이어야 보는 사이 기쁘기도 하고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잘된 것이 많을 수야 없잖아요』
그의 과작은 무욕(無慾)의 인생철학에서 나온 것인 듯 싶다. 50년이 지난 책상을 사용할 정도로 소박한 살림살이 역시 그렇다. 한평생 온 몸과 마음으로 가난하게 살다간 프란치스코 성인을 주보로 삼은 이유에 대해 그는 『그 사람 새도 좋아하고 순진한 데도 있고…』라고 답하며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피씨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는 성프란치스코의「평화의 기도」 고린토전서 13장 4∼7절의 「사랑」에 관한 성서말씀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영세한 지 10년이 넘어도 아직 저는 신앙의 문턱에 서있는 수준이에요. 교무금 조금 내고 어쩌다 명동성당에나 가끔 나갈 뿐이지. 아직 제가 믿는 바는 하늘에 군림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신이기보다는 불쌍한 우리들 속에서 고 뇌를 같이하시고 우리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주시는 인간적인 예수님이거든요』
시력이 약해진 탓에 책읽기가 어려워졌지만 피씨는「하느님이 주신 복」인 청력으로 책을 「듣는다」. 제자가 읽어주는 요즘 책도 '보고' 영시 테이프를 음미하며 영문학을 가르치던 기억을 새삼 회상 하기도 한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의외로 젊은이들이 많다.
『난 교훈적인 얘기는 하지 않아. 그저 허물없이 웃고 떠들다 돌아가는 거지』「영롱한 지성의 빛남과 아울러 동심과 같은 순진무구한 작품세계」로 평가받는 그의 만년은 지금껏 그가 걸어온 인생길, 작품세계와 다름없다.
『하느님에 대한 변치않는 믿음은 「하느님은 사랑이다」는 사실이에요. 내 글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주기를 바랄 뿐이죠. 참 염치없는 사람이지…』
13세에 첫 동요를 발표한 후 70여년 동안 2000여편의 동요와 동시를 써온 이의 마음은 어떤 색깔일까? 「새나라의 어린이」「엄마 앞에서 짝짜꿍」「어린이날 노래」「졸업식 노래」「고향땅」「낮에 나온 반달」「퐁당퐁당」 ….
누구나 어린날의 기억을 되살려 흥얼거릴 수 있을 법한 이 노래들의 주인공은 아동문학가 윤석중씨다. 그의 생각에 따르자면 노래의 주인공은 물론 「어린이」겠지만.
『내가 13세 때, 당시 일제시대였는데 학교에서 「하루」라는 동요를 가르쳐 주었어요. 우리말로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일본말로 '봄' 이란 뜻이었지. 그 후로 동요와 동시를 짓게 되었죠』
애국가를 어린이의 정서에 맞게 풀이한「나라사랑노래」를 만들고 있다는 그는 아직도 새싹회 회장으로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는 「평생현역」이다. 최근 어린이 글짓기 시상식을 위해 지방 6개 도시를 순회할 정도로 어린이를 위한 그의 마음은 변함없이 푸르다.
『어른들의 위선 속에서 자라면서 어린이가 어린이다워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지요. 어른들이 거짓을 벗어던진다면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질 것입니다. 동심이 상처받고 시들지 않도록, 파란 마음에 멍이 들지 않도록 그대로 놔두십시오』
요즘 아이들이 자기 노래 없이 자라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는 그는 아이들의 책읽기를 권유하며 『아이들에게 무조건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기보다 엄마가 함께 읽어주면 더욱 좋은 독서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노래 만들 때만이 아니라 늘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고 어린이의 눈으로 보려고 하니 늙을 틈이 없어요. 딴 욕심 부리지 않고…. 어린이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즐거워요』
장수비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같은 질문에 대한 피천득 선생의 생각과 하나로 닿아있는 듯.『특별한 비결이 있는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 보니 오래 살았지. 술, 담배 안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욕심부리지 않고. 얘기 친구 좋아하는 것 외에는 돈, 권력, 명예 어느 것 하나 가지려고 애쓰지 않았거든. 모든 것에 욕심을 버리면 평화로워지고 몸도 건강해져요』
■ 피천득 선생은…
1910년 서울 출생
1930년 신동아에 「서정별곡」「파이프」등을 발표
1940년 중국후장대학교 영문과 졸
1945년 경성대 예과 교수
1946~74년 서울 사범대 영문과 교수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 문화훈장 수상
1995년 인촌상(문학부문) 수상
1997년 인연(피천득 문학전집) 간행
1999년 제9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수상
현 서울대 명예교수
■ 윤석중 선생은…
1911년 서울 출생
1924년 「신소년」지에 「봄」으로 등단
1933년 소파 방정환이 창간한 잡지 「어린이」주간 이후 「소년중앙」「소년」「유년」「소학생」등 주간 역임
1942년 일본 상지대 신문과 졸
1956년 새싹회 창설 이후 소파상, 새싹문화상 등 제정. 어린이 문학운동 펼침
1961년 3.1 문화상 수상
1973년 외솔상 수상
1978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1988년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간행
현 예술원 원로회원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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