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 후 가난한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 예술혼을 불태우며 나눴던 우정과 뒷이야기들이 각박해진 현대인들의 가슴에 따뜻한 인간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순수하고 분명한 조형의식을 바탕으로 추상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재불(在佛) 원로화백 백영수(78·프란치스코)씨가 해방 후 전쟁의 암울한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 문인, 음악인들의 묻혀진 뒷 얘기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회고한 책 「성냥갑 속의 메시지」(문학사상사)를 펴냈다.
『캔버스나 물감, 들어오는 일거리도 없는 그 때 다 피운 담뱃갑의 은박지 위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막막한 시간을 견디던 화가 이중섭,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올라온 서울에서 말못할 고생을 하던 어느 날,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나 급히 옷고름을 뜯어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내던 시인 서정주, 수복된 서울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16mm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과시하던 멋쟁이 젊은 영화감독 신상옥…』
은빛으로 곱게 물든 노 화백의 기억 한 켠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을 꺼내어 예술가들의 젊은 날의 초상을 담백하게 그려낸 책 「성냥갑 속의 메시지」를 통해 『낭만이 사라진 현대인들에게 작은 여유를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 작가의 말.
『그 때는 모두들 사는 게 너무도 어려운 시기였고 예술가들이 아무런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명동의 작은 다방에 모인 우리들은 방명록이란 것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곤 했었죠. 다방에 그림을 거는 것을 낙으로 살았던 시절이었죠』
『지난 세월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는 노(老)화백은 50여년의 세월을 견뎌오며 바래고 부스러진 그 방명록에서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동료들의 아련한 냄새와 음성이 느껴진단다.
17년 전 「검은 딸기의 겨울」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는 이 책은 60년 이후의 이야기와 작가의 최근 근황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의 청을 받아들여 재출간됐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은 우리에게 친근한 문인과 화가들의 젊은 시절 친필이 담긴 방명록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
「소년」지의 표지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백화백은 타원형의 둥근 얼굴과 정다운 녹색을 위주로 어린아이의 순진함과 단순하고 평온한 느낌의 그림과 모자(母子)상을 그려왔다. 지난 9일 책과 함께 이제까지의 작품을 모은 화집을 발간, 출판 기념회를 가진 백화백은 『팔순 즈음 한국에서의 작품 전시회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백영수 화백은 77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요미우리 아트센터 전속화가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 밀라노 파가니 갤러리 초대전을 비롯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100여회에 이르는 초대전을 갖는 유럽화단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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