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의 이끄심을 거역할 수 없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망치듯 입회한 수도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수도생활이건만, 입회 후 20여 년 동안 줄곧 나의 내면세계를 괴롭혀 온 어떤 것이 있었다.
수도생활을 두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어려움은 대개 독신생활에 관한 것이다. 물론 독신생활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결혼생활이라고 그리 만만하겠는가. 결혼생활이든 수도생활이든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에는 모두 좥함께 삶좦의 어려움, 공동생활의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또 상당수의 수도자들은 순명서원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내게도 이것들이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내 몸을 찌르는 가시처럼」 2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온 무서운 질병과도 같은 고통이 하나 더 있었다. 너무도 부끄러워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20여 년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가시는 『지금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과연 생산적인 것인가?』라는 회의였다. 이런 식의 삶의 방식은 비생산적인 것이 아닌가? 생산성이란 전무(全無)하지 않은가? 사회에 어떤 유익도 제공하지 않는 삶이 아닌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죽인 전당포의 노파처럼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아닌가? 선생 수녀님 지도 신부님이 아무리 가르쳐도 꺾이지 않는 카랑카랑한 실증주의(實證主義) 정신 한줄기. 그것은 의식 한 구석에 숨어서 간단없이 나의 내면을 찌르고 또 찌르며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가시가 제거되고 그 찌르는 듯한 아픔에서 해방된 것은 마흔이 지나서였다. 마흔을 넘기고서야 세상의 고통, 고뇌, 아픔, 비틀림, 슬픔 등이 조금씩이나마 있는 그대로 보였고 그러자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을 진선미(眞善美)와 거룩함(聖)의 원천이신 그분께로 향하도록 고무시키는 일이 결코 비생산적인 일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었다. 있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던가 보다. 누구처럼 불혹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니고 사는 모습도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과는 달리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보이고 받아들여짐은 미련한 종을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은총이리라. 그분이 맡기신 사명, 그것이 무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긍지를 지닐 수 있기까지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내게 내리신….
출애굽기 3~4장. 양을 치던 중 문득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미디안의 목동 모세는 그분으로부터 자신의 생을 완전히 전환시키게 될 한 사명을 받는다.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신 하느님의 이 산은 엘로힘계(E)와 신명기계(D) 전승에서는 「호렙산」으로, 야훼계(J)와 사제계(P) 전승에서는 「시나이산」으로 불린다. 하느님은 장차 이 산에서 당신 백성을 만나주시고 피난 온 엘리야 예언자도 만나주실 것이다.
3장 7절 이하에서는 모세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7~8절(J)과 9~10절(E)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7~8절에서는 백성을 구할 주체가 하느님인데 반해 9~10절에서는 모세이다. 다시 말해 모세의 사명은 7~8절에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일이고, 9~10절에서 보면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전승자들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인데 누가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고 오히려 둘 다 옳게 전한 것이라 하겠다. 출애굽의 사건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작품인 동시에 하느님의 종 모세에게 맡겨진 지고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
3장 12절에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너와 함께 하겠다』고 확약하신다. 이에 대해 모세는 자신을 파견하려는 신의 이름을 묻는다. 14절에서 마침내 하느님의 이름이 밝혀진다(신명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는 생략하기로 한다). 4장에서는 모세와 하느님 사이의 밀고 당기는 게임 끝에 마침내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이고 가야 할 곳을 향해 비장하게 떠나는 모세와 그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수행해야 할 어떤 사명을 받는다. 자기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오랜 시간 갈등에 갈등을 거듭한 나와는 반대로 자신의 사명과 존재 의미를 일찍 알아차리고 기쁘게 살면서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는 「오체 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를 생각해본다. 그는 남들 다 가진 팔다리조차 없는 그야말로 불만족 자체의 인간이지만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았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행해야 할 사명이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사명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어 수행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 해도 순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미혹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인간이라 하겠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수행해야 할 사명, 하느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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