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왜 할머니가 왜 두 분이시지? 어린 시절 문득 나를 엄습해온 첫 의구심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내가 「큰할머니」,「작은할머니」로 부르던 두 분의 할머니가 계셨다. 선친과 어머니는 작은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셨고, 작은할머니는 또 큰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셨으니 큰할머니는 나의 증조모셨다. 이른바 4대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큰, 작은」은 대가족의 맏딸로 태어난 내가 말과 동시에 습득한 첫 범주였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분의 묘에 「열녀비」를 세워 드렸다. 오래 전 일이다. 그런데 몇 년전 우연히 짐을 정리하다가 아직도 살아 계신 내 조모와 어머니가 각기 받으신 효부(孝婦)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의 가슴에는 기쁨보다 오히려 가슴이 저미는 것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증조모 이하 여인 3대는 무슨 「비」나 「상」으로는 결코 보상될 수 없는 「희생」과 「상실」로 점철된 일생을 사셨기 때문이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몇 대째 독자이셨던 나의 선친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셨다. 선친은 그분들의 기쁨이요 희망이요 생명 그 자체였다. 참으로 무력했지만 두 고부 과부는 마치 자매처럼 힘을 합쳐 선친을 키우고 교육시키셨다.
그런 선친이 서른 일곱의 젊은 나이로 우리를 떠나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족에게서 기쁨을 앗아갔는데 특히 할머니께는 치명적인 것 그 이상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이별인 죽음이고, 무엇보다 참척의 아픔일 것이다. 그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건 않건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이 고난이 전 이집트에 사람은 물론 동물에게까지 동시에 일어났다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못해 소름 끼치는 마지막 재앙일 터이다.
출애굽기 10장에서 온 세상이 「손으로 만져질 만큼」 짙은 어둠으로 묘사되는 아홉째 재앙은 닥쳐올 마지막 재앙의 파괴력을 극명하게 예고한다. 암흑이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가장 무서운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제국주의자들이 그러하듯 파라오 역시 아직 어떤 민족 하나를 통째로 자신의 노예로 잡아두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제 야훼 하느님은 그런 파라오에게 더 이상 재앙을 통고하시지 않으신다. 협상의 기회, 회개의 여지마저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다(출애 11장 이하).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의 예방법을 알려주고 이를 피하게 하실 뿐이다. 이제 더는 도리가 없다. 이집트의 모든 첫째들은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짐승의 맏배까지도 이 마지막 재앙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인들이 그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한 예방 조처로 행한 예식(밤에 양을 잡아 집의 출입구에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나누어 먹은 것 등)은 일종의 희생제사였다.
밤에 거행되는 희생제사 관습 내지는 그 희생제물(짐승)을 가리키는 말인 「과월」의 희생제사는 작은 가축을 몰고 방랑하는 목자들의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고대근동의 이 방랑하는 목자들은 겨울에는 겨울 목축지에서 지내다가 이른 봄이 오면 농경지로 떠나게 된다. 길을 떠날 때는 사람이나 짐승에게 위험이 따랐는데, 특히 새로 난 것과 처음 난 것의 희생이 크기 마련이었다. 첫 배와 맏물에 닥치는 이 재앙을 막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목자들은 특별히 가축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 제사는 무엇보다 재앙을 막아내는 방편이었다. 피를 바르는 의식이라든지, 예식을 밤에 행하는 것 등은 이 제사의 주술적 성격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밤은 특히 화가 엄습하는 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과월의 제사는 떠남의 상황에서 연유한다. 이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광야로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야훼께서 이집트에서 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해 해마다 이를 반복하라는 명을 받는다. 재앙의 모면을 기원하는 과월의 제사에 종살이에서의 탈출 및 해방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지고 강조되어 「과월절 희생제사」가 된 것이다. 이 과월절 희생제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누룩 없는 빵의 축제(무교절)와 연결된다. 무교절은 보리 수확을 시작할 때 지냈던 농경 축제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난해에 추수한 것으로 만든 것은 하나도 넣지 않고(누룩조차도), 순수한 햇곡식으로 만든 빵을 먹는 갱신 및 재개의 의식이었다. 마치 세례를 받음으로써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과 함께 가나안 농경민의 이 축제를 받아들이면서 이집트 탈출과 관련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처럼 기원과 발생 지역이 다른 두 풍습이 쉽게 결합된 것은 시간적으로 비슷한 때 지켜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이 구약의 과월절(빠스카)의 완성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 과월의 어린 양이 되셔서, 피 흘리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 백성을 죄의 종살이에서 탈출시키시고 해방시키셨다. 이로써 그분의 백성인 우리는 마치 누룩 없는 빵처럼 그렇게 순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지도 졸지도 않으시고 특별히 이스라엘을 밤새워 지켜주신 야훼께서(12, 42) 오늘도 이 구원행위를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사에서 당신 백성을 그렇게 지켜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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