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진리에 몸 바치는 삶을 산 박석희 주교가 10월 9일 오후 6시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일관된 사목표어를 토대로 오로지 진리의 편에 서서 살아온 참목자 박석희 주교. 철학을 전공한 학자출신 목자 답게 『진리의 올바른 수호를 통해서만 인간의 참 가치가 구현되고 인간 됨됨이도 바르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던 박주교.「가난한 사람은 복되도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몸소 실천하며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먼저 어루만져주던 박주교는『암울한 이 시대에 신앙인들이 먼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당부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품에서 또다른 평안을 얻은 박주교의 넉넉한 인품과 온화한 미소를 다시한번 떠올려 본다.
『진리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진리이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로 알아듣고,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면 그리스도인 모두는 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박석희 주교가 지난 1990년 12월 안동교구장에 취임하며 본지와 가진 기념인터뷰에서 피력한 취임소감이다. 이같이 박주교가 걸어온 길은 오롯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그분안에서 함께 살며 사랑하고 일해온 여정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필립 2, 5)란 박주교의 사목 표어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박주교는 『내가 생각하는 바른 행동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바른 행동을 만든다』며 『우리 모두 진리에 몸바치는 사람이 되자』고 늘 강조해 왔다.
농촌에서 태어나 성주농고를 졸업한 박주교. 누구보다도 가난한 농민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던 박주교의 이같은 심성은 대표적인 농촌지역인 안동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농민들이 겪고 있는 소외감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생활자세를 가지는 것이 선행돼야 할 것입니다』이와『께 농촌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교회의 활동 못지않게 정책적인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박주교는 91년 안동사제단과 공동으로 농업정책 대전환을 촉구하는 서한을 대통령에게 발송하기도 했다.
암담한 사회현실과 농민실상에 대해 개탄하고 정부의 농업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 농정(農政)의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정책 수립을 촉구한 이 서한은 당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농민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개선에 한몫했다는 평을 들었다. 박주교의 이러한 농민사목 방향은 2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생명」과 「공동체」로 확대 변화됐다.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 문화창조」라는 모토아래 안동교구를 제도중심의 교회에서 공동체 중심의 교회로 탈바꿈 시키려 노력한 박주교는 「물질과 소비, 경쟁 중심」의 가치관에서 「생명과 공생 중심」의 가치관으로의 생활변혁을 꾀하여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박주교의 이러한 사목적 전환은 사목지역이 생명을 키우고 가꾸는 농촌지역일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생명을 위해 사랑으로 몸바쳐 투신하는 데 있다」는 정신에 바탕한 것으로 「생명은 본성상 공동체를 지향한다」는데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박주교의 「생명」에 대한 관심은 올 9월 24일 「대희년 전국 생명.환경 신앙대회」를 성황리에 치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박주교의 소외된 사람에 대한 사목적 열성은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재임시 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박주교는 『사회복지활동은 교회의 「착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교회 모습을 부각시키는 행위』라며 『사회복지활동은 일시적인 활동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 흡입되어 문화의 일면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말은 박주교의 거시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간 일회적이며 긴급구호적인 성격이 농후했던 한국가톨릭교회의 복지활동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체체로 변화의 기틀을 마련한 박주교의 사회복지활동에 대한 신념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해온 박주교는 98년 7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양심수 특별사면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유용한 성명를 통해 난해한 정국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왔으며 「사형폐지 세미나」등 각종 인권 수호 운동과 더불어 특히 무한경쟁과 상업적 속성을 지지하는 「신자유주의」의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안전장치 역할을 톡톡히 해오기 했다. 1941년 3월 19일 경북 성주군 월항면 장산리에서 아버지 박성빈(보니파시오)와 어머니 배옥화(안나)씨 사이에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난 박주교는 전통적인 유교가문인 집안 분위기상 어린시절 신앙을 갖긴 힘들었다. 그러나 가깝게 지내던 박도식 신부(전 대구가톨릭대 총장) 집안과의 인연으로 고등학교 2학년때 세례를 받았다.
공소회장을 하던 박도식 신부의 아버지는 어린 박주교가 공소에 놀러올 때마다 순교자나 예수님에 관해 들려주며 신앙적 심성을 키워줬다. 당시 성주는 베네딕도회 독일 신부 들이 사목하던 시절. 독일 신부들의 삶을 보며 「진리를 향한 사제들의 삶은 참 아름답다」고 느끼던 박주교는 신학교에 들어갈 결심을 굳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친 박주교는 몰래 서울가톨릭대 신학부 별과인 「철학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집안에서는 부친이 박주교를 데려가기 위해 신학교를 찾아오는 등 완강한 반대를 했지만 박주교의 굳은 결심을 꺽지는 못했다.
박주교의 신학교 시절은 번민의 연속. 「하느님의 존재」에 관해 이성(理性)과 신앙과의 갈등속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 했다. 그러나 결국 이성을 포기하고 신앙으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이기로 결심한 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박주교의 이러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품은 훗날 철학을 전공하게 된 한 동기가 됐다. 1971년 사제품을 받은 후 대구 대봉동 본당과 계산동본당 보좌를 역임한 박주교는 74년 로마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가 78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전」에 나타난 존재론』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주교는 「가톨릭 문화와 타종교」「초월적 인간론」「칸트의 신 존재 증명과 토마스 철학의 초월적 방법」등의 논문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등의 저서를 발간하며 의욕적인 저술활동을 펼쳐오기도 했다.
■ 연보
1941.3.19 경북 성주군 출생
1956.3-1959.2 성주농업고등학교
1962.3-1970.2 서울가톨릭대학교
1970.3-1971.9 서울가톨릭대학교 대학원(석사)
1971.10.23 사제 서품
1971.11-1972.10 대구 대봉동 천주교회 보좌신부
1972.11-1974.5 대구 계산동 천주교회 보좌신부
1974.9-1978.6 이탈리아 우르바노 대학(철학박사)
1980.1-1980.10 대구 자인천주교회 주임신부
1980.11-1982.2 천주교대구대교구 사목국장 신부
1982.3-1990.11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1990.10. 제2대 안동교구장 주교로 피명
1990.12.2 제2대 천주교 안동교구장으로 착좌
1996.10.15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임명
1998.11 가톨릭교육재단협의회 회장 임명
1999.10.14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연임
2000.9. 로마 한인신학원 제2대 총재 주교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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