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벗들은 장례식 조사에서 한결같이 선친의 뛰어난 유머 감각을 회상했지만, 내 기억 속의 선친은 과묵한 분이셨다.
다만 약주를 들고 오신 날은 예외였는데, 그날만은 당신의 맏이인 내 이름을 반복해 부르면서 조건부 약속을 하시곤 하셨다. 네가 공부를 잘 하면, (해외) 유학도 보내주마! 생활력이 강하셨던 증조모 덕분에 농토가 상당히 있기는 했지만, 60년대 당시 시골의 말단 공무원이셨던 선친이 자식들을 모두 외국에 보내 공부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자녀들 앞에서는 특히 자신의 말씀에 철두철미했던 분이었기에, 선친의 약속은 만일 그것을 지킬 수 없게 되면 자식들로부터의 신뢰에 금이 갈지 모를 고통의 언약이었다.그것은 자식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한 선친의 사랑법이었다.
이 외에도 선친은 우리에게 조건부 상벌규정을 두셨다. 상의 경우, 공부하기 싫어하는 우리에게 동기를 유발시키느라 점수별로 상금을 정해놓으셨다. 상금의 용처는 저축에 국한되었지만, 그래도 상금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서 잠시나마 공부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더 특이한 건 선친의 체벌법이었다. 선친은 공부를 못한다고 벌을 주신 적은 없지만,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하지 않은 경우는 매를 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것은 말 안 해도 우리 스스로 알 수 있을 만큼 명백한 것들이었다. 선친은 매를 드실 경우 우선 벌받을 아이에게 몇 대를 맞아야 하겠느냐고 묻고 나서 그 아이에게 회 초리를 만들어오게 하신 다음 맞을 때마다 그 횟수를 소리내어 세게 하셨다.
만일 세지 않으면 소리내어 셀 때까지 기다리셨다. 또한 벌받을 아이가 말한 꼭 그만 큼만 때리셨다. 그 이상도 이하도 때리는 법이 없으셨다.
선친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심으로써 그 버거운 약속에서 해방되셨다. 그 당시 나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무신론적(無神論的)으로 사고(思考)하도록 교육 받아온 나는 그분이 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는지알 도리가 없었다.
그분의 귀천(歸天)은 내게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다는 배신감과, 나의 꿈들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절망감,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무의미한 삶을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철학적 물음을 안겨주었었다.
어린 시절 입밖에 내신 약속은 철저히 지키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는 나는 누구와든 일단 언약한 것은 다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본의 아니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성의가 부족해서나 식언(食言)하려 해서가 아니라, 한계상황(限界狀況)에 처한 인간의 유한(有限)한 실존 때문이라 여겨진다. 모든 약속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분은 아마 하느님뿐일 것이다.
출애굽기 19장은 그 유명한 시나이산에서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을 보도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 계약(약속)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와의 계약(약속)이나 창세기 15장과 17장에 기록된 아브라함과의 계약, 사무엘 하 7장에서 하신 다윗과의 계약과는 달리 조건부 계약이라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의 계약에서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도 내세우지 않으신다. 그들이 잘 살면 이라든지, 내 말을 잘 지키면이라든지 그런 조건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느님의 말을 듣고 그분이 세워준 계약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제시된다. 이 조건을 지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 리라.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5~6절)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후환(?)이 뒤따른다. 왕정시기에 등장하는 예언자들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로 이 시나이 계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포한다. 이 계약이 조건적 계약이기때문이다.
삭막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동경하며,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또 많은 심리학자들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체험해야 한다고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나이 계약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상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 나의 선친도 공부를 잘하면 상금을 주고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는 하셨지만, 실은 당신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다.
하느님도 당신의 말씀을 지키면 당신의 특별 소유와 사제적 백성이 되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계약이 파기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실은 우리 인류를 거의 분별력이 없으실 만큼 그렇게 사랑하신다 (요지경 속인 세상을 멸망시키시지 않으신 것을 보면 하느님 사랑도 분별력을 잃으신 것 아닐까!).
사실 학생이 공부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하느님 백성이 진정 하느님 백성다워지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아니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도 하느님의 말씀은 지켜야 한다. 신을 잊어버린 인간은 사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다윗에게 하신 무조건적 약속(계약)이 사랑인 것처럼 시나이에서 주신 조건적 약속(계약)과 심판의 경고도 표현만 다를 뿐 그 본질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이다.
오늘 살펴본 출애굽기 19장 첫 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 도착하는데 이곳 떠나는 것은 민수기 10장 28절이니, 오경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법에 대한 이야기로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모세가 전에 하느님 산에서 홀로 체험했던 것을 이제는 온 백성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체험하게 된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