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십계명이라 부르는 출애굽기 20장 1~17절(신명 5, 6~21 참조)을 이스라엘인들은 (열 가지) 말씀이라 한다.
계명이라 하지 않고 말씀이라 한 것은 이를 고역스런 명령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여는 축복으로 받아들인 때문이다.
실제로는 열 가지가 조금 더 되는 이 말씀에는 크게 보아 하느님 과의 관계(2~11절)와 사람들과의 관계(12~17절)를 바르게 살게 하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지침이 담겨있다.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는 말씀은 꼭 신(神)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양심있는 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행동해야 할 만한 것이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기소개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질투하는 신(5절)이라 소개하신다.
이 소개말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내게는 질투에 대한 세 번의 쓰라린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은 가 끔 넌 선생님이 신용주니까…라며 나를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었다. 신용준다는 말은 특별히 사랑한다는 의미의 또래말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이 나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시골에서는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많았으므로(12살에 입학한 아이도 있었다), 너무 일찍 입학한(만5세) 내가 선생님의 보호 대상이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가끔씩 따돌림을 당하던 나는 무고하게 질투의 대상이 되어 억울하다는 심정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이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여학생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잘 아시는 선생님들은 수업 내내 천장만 쳐다보거나 창밖만 내다보거나 하여 공평함을 과시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계셨다.
나 또한 내성적이어서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일은 도무지 하지 않았다.이 문제로 다시 고민하게 된 것은 뜻밖에도 수녀원에 와서였다. 입회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나는, 지금은 퇴회한 한 자매로부터 지도수녀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불평을 듣게 되었다.
내가 보기엔 지도수녀님이 그 자매보다 나 를 더 사랑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해가 바뀌고 지도수녀님이 바뀌었는데도 그 자매는 새 지도 수녀님 역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며 불만을 터뜨리곤 하였다.
참 괴로운 일이었다. 나를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는 지도수녀님께 좥다른 자매들과 똑같이 대해 달라 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자매는 계속 빈정거리고…. 난감했다.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절감하게 되었다.그런데 종신 서원을 준비하던 해, 이번에는 바로 나 자신이 질투의 화신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데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것이 평상심을 벗어나자 질투의 감정이 되었다.
질투를 하는 사람의 괴로움은 질투를 당하는 사람의 괴로움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질투심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다. 수치심 때문에 누구에게 토로할 수도 없었다.
한 동안을 질투의 감옥에서 보내다 다행히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감정이 지나가고 다시는 질투의 지옥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 후 질투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질투하는 신이라 말씀하신다. 상대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질투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당신을 향한 우리의 나누임 없는 마음, 갈라지지 않은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면, 얼마나 우리의 오롯한 사랑을 갈구하시면 당신 체면을 손상시킬 위험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런 유치한 말마디까지 사용하시며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박광호 신부는 이 야훼의 질투를 당신 백성의 충성에 대한 불타는 정열이라 풀이하면서 이 둘을 동의어라고 하였다(모세오경의 가르침 174쪽).
사실 질투는 칭찬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인격체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질투하는 신이라는 말에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우리와 계약을 맺으시고 계약의 동반자로서 지켜야 할 계명을 주신 하느님은 어떤 관념이나 철학이나 법이나 윤리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가 따 스한 인격적 관계로서 만나야 할 우리의 유일한 파트너이시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 거기 우리의 존재 의미 즉 구원이 있다.
하느님은 특히 당신 사랑의 피조물인 우리가 허무로 끝나길 원치 않으신 때문에 질투 의 하느님으로 나타나신다. 우리가 진선미성(眞善美聖)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떠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무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물질의 우상, 명예의 우상, 탐욕의 우상, 쾌락의 우상 등을 쫓아다닌다.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마음은 허무일 뿐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은 헛된 우상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상도 만들지 말라 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어떤 상에 한정될 유한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우상은 인간의 인격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런 우상을 섬기는 자는 그 우상과 같은 존재이다. 또한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 불필요하거나 거짓된 맹세 등 헛된 것에 이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이름은 인격을 나타낸다. 우리가 존경하는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듯이 그분의 이름을 헛되이 마술적으로 사용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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