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베스트셀러를 쓸려면 출가(出家)해야 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서점가를 신나게 하는 책들 중 하나인 만행(萬行).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의 저자 현각 스님과 그의 도반(道伴)들의 이야기는 내게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가살아있는 보살이라 소개한 무상 스님이 약자들을 위해 법을 공부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계약의 법전(출애 20, 22-23, 33)의 법정신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관심이 끌렸다.
걸어다니는 컴퓨터라는 별명을 지닌 무상 스님은 미국 상류 가정 출신으로 그의 부모는 이른바 백만장자이다. 고대문학을 전공하고 1964년 하버 드를 졸업한 그는 흑인 인권운동을 하다가, 약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돕고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예일대학 법대 대학원에 입학한다.
현재 미국 대통령 부부인 클린턴과 힐러리는 그의 1년 후배이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법이 사회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라는 확신이 사라지면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통제하고 구속하는 방편이요 강자와 엘리트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예일대학으로 법문 오신 한국의 숭산 스님을 만나 감화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무상 스님의 회의(懷疑)처럼, 정의와 평화를 위한 무기여야 할 법이 현실 에서는 약자를 억압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성서에도 법(法)이 상당히 있는데, 우리 본문인 계약의 법전도 그 중 하나이다. 성서의 법은 대부분 율법(律法) 혹은 오경으로 번역되는 토라에 담겨 있다.
하지만 히브리말 토라는 일반상식의 법과는 상당히 다르다. 토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훌륭하고 슬기로운 백성으로 살아갈 지혜를 가르쳐 주는 생명과 은총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법(토라)을 잘못 이해하면 율법주의(律法主義)가 되고, 인간을 속박하는 멍에가 된다. 예수께서는 법의 근본정신은 잊어버리고 형식에만 매달리는 율법주의를 매섭게 질타하 셨다(마태 23장 참조). 모든 법은 엄밀히 말하면 계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서의 법도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의 문맥에서 선포된다.
계약식에는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겠다는 백성들의 약 속이 포함된다(출애 19, 7~8 24, 7). 계약의 법전도 실제 만들어진 시기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기 시작한 이후이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요구는 모두 계약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 성서편집자의 관점에 따라 계약의 전승인 시나이산 전승 문맥에 삽입된 것이다.
계약의 법전이라는 명칭은 출애굽기 24장 7절에 나오는 계약의 책(공동번역에서는 계약서)에서 따온 것인데, 현재의 위치에 삽입되기 전에는 십계명을 가리켰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계약의 법전의 기본사상은 약자보호이다. 야훼 하느님은 이 약자보호법의 제정 근거로서 무엇보다 이스라엘인들 자신이 이집트에서 의지가지 없는 약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신다.
그러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자기의 어려웠던 처지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고 돌아가신 의사 김남호 박사는 우리의 모범이다.
어려운 시절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그는, 평생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극빈의 삶을 살았다. 사람들과 사귀는 시간과 경비까지 아꼈기에, 삶의 자취를 더듬기 조차 힘들었던 그의 일생은 경이 그 자체다. 그의 삶을 기록한 책, 하늘을 쳐다보든지 땅을 굽어보든지를 꼭 일독(一讀)하라고 권하고 싶다.
김수환 추기경도 그에 대해 저는 청빈을 거듭 설교하면서도 그것을 살지는 못하고 있는데 김박사 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청빈을 사신 분이십니다 라며 옷깃을 여민다.
각설하고, 약자보호법 제정의 또 다른 근거는 야훼 자신이 바로 약자들의 후견인이라는 선포이다. 이 법전은 살인, 과실치사, 과실 치상, 절도, 손해배상 등 인간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죄들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거의 모든 세계에서 그러했듯 노예제도를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고(출애 21, 1-11)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오는 끔찍한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출애 21,23-25)도 보인다.
그러나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는 이 동태복 수법은 오직 법적(法的)인 공동체가 재판하는 경우에만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 법은 사사로운 복수의 법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공적인 법이다.
피해를 입힌 바로 그만큼만 벌을 주어 폭력의 악순 환을 막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이 법을 폐기하신다.동태복수로서는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궁극적으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폭력은 폭력을 확대재생산 시킬 뿐이다. 진정한 평화와 사랑의 나라는 오직 용서와 사랑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사랑으로 사시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심으로써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재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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