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거기 그렇게 머문 공간과 시간은 일상적인 삶을 초월한 거룩한 공간과 시간이다. 오늘 우리 본문인 출애굽기 25∼31 장에서 하느님은 모세만이 아니라 당신과 계약을 맺은 백성 모두가 이 지상에서부터 「거룩함」 즉 신비(神秘)를 누리며 살도록 공간과 시간, 사람과 물건들까지 준비시키신다.
눈에 보이는 거룩한 공간인 성막(聖幕)은 오늘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성전(聖殿)이다. 이 성막 안에는 증거 궤, 젯상, 등잔대 등의 거룩한 물건(聖物)이 갖춰진다.
거룩한 시간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일컫는데, 특히 한 주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일은 거룩한 중에도 가장 거룩한 시간이다. 이 거룩한 시간과 공간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봉사자로서 일할 사제가 성별되어 축성(祝聖)된다.
사람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도 「신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또 인정하지도 않지만, 인간은 현재의 자신을 초월하는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살아간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거나 「사람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사랑, 우정, 명예와 같은 추상명사로 산다」와 같은 말은 인간의 그런 측면을 강조하는 말일 터이다. 인간은 일상적 현실을 넘어서는 신비, 혹은 거룩함에 대한 갈망과 그에 대한 체험 없이는∼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체험이 가능한 장소나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인 장소와 시간은 모두 이에 속한다.
나의 본가(本家)에는 삼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방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방에는 아직도 아버지의 다리낮은 책상이 놓여져 있고, 책들과 사무용품은 물론 심지어 아버지가 입으셨던 삼십여 년 된 양복도 몇 벌이 걸려 있다.
그 방에 들어가면 나는 언제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분을 만난다. 마치 아버지가 벽 위의 사진틀에서 나를 보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도자의 하루를 여는 첫 일성(一聲),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는 일상의 시간을 깨는 거룩한 시간의 시작이다. 잠자는 동안 닫았던 입술을 주님께 열어달라고 청하는 이 기도는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다.
이 기도를 올리는 순간은 주님이 열어주신 입술이기에 남을 해치거나 주님을 욕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도가 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나름대로 일상적인 시간을 벗어나는, 무언가 거룩함의 시간을 체험하며 살아간다.거룩한 공간과 시간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성막 기사는 금송아지 사건 (출애 32∼34장)을 전후로 하여, 성막에 관한 하느님의 지시(출애 25∼31장)와 이스라엘의 실천 (출애 35∼40장)으로 나뉘어지지만 내용은 거의 중복된다.
바빌론 유배와 귀환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제계 전승에 속하는 오늘 본문은 특히 광야시대의 이동식 성소와 예루살렘의 일정 위치 에 정착된 화려한 솔로몬 성전을 결합시키면서 성막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광야시대 이후 줄곧 하느님 백성과 함께 이동하며 고락을 같이한 성막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성전을 짓기 이전부터 이미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고 싶어하셨으며 실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 앞에 쳐놓은 휘장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 이 휘장에는 거룹모양이 수놓아져 있다.
지성소에는 하느님 현존의 보증인 증거궤가 있는데 그것은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었다. 그 증거궤의 덮개는 거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의 속죄판인데, 이는 하느님의 발판이라 여겨져 후에는 전례 중에 하느님을 만나고 죄가 사해지는 장소로도 여겨졌다(레위 16, 12∼15 참조).
성소에는 오른편(북쪽)으로 제사상이 있고 그 맞은편 에 등잔대가 있으며 휘장 바로 앞에는 분향단이 놓여있다. 대사제와 사제들의 임직식은 세 부분으 로 이루어진다(29, 1∼35). 정화예식으로써의 목욕(4절), 착복(5∼6. 8∼9), 기름 부어 성별함(7)이 그것이다. 10절 이하는 새로운 직무에 앞서 거행되는 여러 희생제사 규정들이다(10∼35절).
예루살렘에 봉직하는 대사제의 거룩한 예복이 장황하게 묘사되고 임직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착복이 중 요하게 거론됨은 하느님 앞에 나아감이 옷을 바꿔 입음(19, 10), 곧 하느님 앞에서 거룩해지기 위해 속된 것을 버림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임승필 신부는 주석한다(구약성서 새 번역 <탈출기. 레위기> 참조).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가끔씩 탈출을 꿈꾸는 우리가 진정 갈망하는 바는 어쩌면 이 「거룩함」의 체험일 터이다. 이 거룩함에의 체험은, 오토의 표현을 빌면, 우리를 한없이 매료시 키면서도 두렵고 떨리게 한다.
그리고 우리 삶을 그 「궁극적 관심」에로 정향시킨다. 신은 인간에 게 이 「거룩함」을 우리 일상의 삶에서도 체험할 수 있도록 「종교」라는 선물을 만드셨다고 한다.
종교라는 선물로 현실에만 집착하지 않고 초월을 지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신 신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