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6장은 성법전의 결론 부분으로 야훼 하느님의 마지막 권면과 훈계이다. 여기서 성법전은 복(福)과 저주로 끝을 맺고있다.
야훼를 바로 섬기는 사람, 즉 야훼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복이 따르고, 반대로 제멋대로 설치면 (하바꾹 2, 4 참조) 하느님께서 옳게 보아주시지 않는 저주가 따르므로 필연적으로 선택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정해준 규정들을 따르고, 내가 지시한 계명들을 지켜 그대로 하면 내가 너희와 맺은 계약을 이루리라. 나는 너희 가운데 살며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위 26, 3~13).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는 행복과 번영에 대한 보증이며, 이를 위반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벌을 불러들이는 근원이라고 명백히 하고있다. 우상들이나, 신상, 석상들을 세우고 그 앞에 엎드리지 말라는 법규는(26, 1~2) 출애굽기 20, 4 신명기 4, 16 출애 34, 13절에도 나온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 회당에는 이러한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내 모시는 성상들은 성상 그 자체를 공경하거나 흠숭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표상일 뿐이다. 40~45절은 결론 부분이다. 하느님의 연민에 가득 찬 자비와 사랑에 대한 말씀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뉘우치고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계신다. 이는 루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와 매우 유사하다.
26장 전체의 사상은 예언자들이 부르짖는 권면의 내용과 같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복은 여기서는 주로 물질면의 복으로 나온다. 그러나 물질적 복 후에는 모든 복의 샘이며 완성인 영적인 복, 특별히 하느님 친히 당신 백성들 사이에 사랑을 가지시고 머무르시겠다고 하는 것이 덧붙여졌다.
야훼를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저주는 주로 병과 패배, 가뭄과 흉작, 야수, 포위와 전란, 전염병, 기근, 죽음, 황폐, 맨 마지막으로는 유배시대의 비참한 상태가 묘사되어있다 (34~39절). 맨 마지막 46절은 이 장의 마무리라기 보다 출애굽기 25장부터 여기까지에 대한 결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27장은 성법전의 부록이다. 서원한 사람이 어떻게 그 서약 예물 값을 치르고 대속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십일조 규정에도 적용된다. 서약예물의 값으로 드리는 것에는 사람, 짐승, 토지, 등이 있다 (2~25절). 이 값의 원리가 십일조에 적용되어 십분의 일은 야훼 하느님의 것이었다 (레위 67, 30~33). 십일조라는 말은 민수기 18, 20~32 신명기 12, 17이하 26, 12~15 등에도 나온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개신교에서는 이 십일조의 실천이 매우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는 매우 미흡하기 보다는 거의 실천이 안되고 있는 현실이다. 굳이 물질적인 십일조는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없을까? 예컨대 하루가 1440분이라면 1440분의 10를 하느님을 위하여 내 시간을 바칠 수 없을까? 이는 2시간 반정 도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의 시간 십분의 일을 어디에 소모하고 있는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많은 현대인들은 황금의 신, 향락의 신, 권력의 신에게 정성을 다 바치면서 살고있고 그들은 주로 텔레비젼 바라보기, 컴퓨터게임, 노래방, 극장, 쇼핑, 음식점 등에서 시간을 보낸다. 각종 매스미디어와 선전의 모든 수단들도 현대인들로 하여금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유도하고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셀 수 없는 음식점들이 나라전체를 채우고 있다. 『오늘날 텔레비젼은 제 2의 신(神)이다』라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라디오와 텔레비젼은 거의 중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각한 현실이다. 그러니 교회나 하느님께 드리는 시간은 있을 수가 없다. 세상의 향락과 일에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다 바치고 살고있는 것이 오늘날 세상사람들의 삶이 아닐까? 만약 우리 신도들만이라도 십일조가 아니라 이십일조 아니 삼십일조 만이라도 하느님을 위하여 시간이나 물직적인 것을 내 놓는다면 우리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이제 일반적으로 잘 읽혀지지 않는 레위기를 마치면서 몇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이 레위기의 규정은 예수님과 그의 부모, 사도들까지도 지키셨다는 점이다: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를 주님께 봉헌하려는 것이었고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정결례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다』(루가 2, 21~23).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려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가 열 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루가 2, 41~42 ).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생애는 레위기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레위기의 모든 전례 규정이나 법은 이스라엘 신앙의 표현이요 고백이다. 레위기를 모르고서는 사도 바울로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에 대한 가르침이나 히브리서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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