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타 성서와 현대번역판에서는 1~4장에서 병적 인구조사로 시작되고 다시 26장에서 인구조사를 한 사실에서 문자 그대로 그저 수(數)를 나타내는 책으로 「민수기」(Liber Numeri) 라고 부른다.
히랍어 표제도 『아리트모이」(수효)라 부르고, 탈무드의 고대 히브리어로는 「오경중에 등록된 자에 대한 책」으로 되어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느님을 거슬러 고집이세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당시 정신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의 책」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모든 명칭들은 민수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나온 그 이듬해 야훼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들로 시작한 역사서술과 율법규정들이 뒤섞여 있어서 통일성이 희박하고 다소 복잡하다는 평이 학자들 사이에 있다.
이 책의 이야기 거의 전부가 원래 전해 내려오는 전통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민수기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나타내고있는 계약의 깊은 의미를 현실화하고 광야의 이상과 그들의 성소(聖召)를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크게 세 기간으로 나눈다. 제1부는 1장에서 10장 10절까지로서 시나이산에서 마지막 9일간의 광야여행 준비를 다루고, 제2부는 10, 11~22, 1절까지로 시나이산에서 모압평야까지 38년이라는 긴 광야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부분이다.
마지막 부분은 22장 2절 ~ 36장 13절까지인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준비로서 모압평야에서 5개월간 지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수록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본격적인 길고도 험한 광야여행준비로 우선 철두철미한 병적조사와 부대편성 그리고 행군순서 등을 다루고있으며 그 다음은 레위인의 역할과 직책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인류 최초의 예언자요 민주정치의 선구자인 모세는 『민족지도자이지 군사전문가는 아니다』라고 유다인 작가 엘리베젤은 말한다.
반대로 여호수아는 천부적인 군사전문가인 모양이다. 일찍이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의 편성과 작전권을 위임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겠다: 『네가 사람들을 선택하라』(출애 17, 9). 즉 장정들을 뽑으라는 말이다.
한사람이 모든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책임나누기를 중요시 하고 있다. 여기서도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각 지파에서 가문의 어른 한사람씩을 내어 이스라엘 각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들로 내세우고 ( 참고.민수1, 2~19) 야훼께서 지시하신 대로 따른다.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병역문제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병역문제를 생각해볼 때 너무나 대조적임을 볼 수 있다. 선거때만 되면 정치인 후보자들의 자녀 병역비리 문제로 여야가 서로 헐뜯고있는 보도가 연일 계속된다.
병역 수사와 관련, 일부 정치인 아들들의 「사지(四肢)연장술」이라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기사를 보면서 실소(失笑)를 자아낸다.
민수기에서 병역 면제는 오직 레위지파에게 내려진 특전으로 소개되고있다: 『레위지파 만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병적부에 올리기 위하여 그 수를 세지 말아라. 네가 레위인들에게 맡길 일은 증거판을 모신 성막과 거기에 있는 모든 기구와 부속품들을 보살피는 일이다』 (민수 1, 49~50).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참으로 병역 면제를 받아야 할 사람은 교회의 성직자들이 아닐까.
민수기에서 「광야」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민수기 이야기는 모두 광야에서 시작하여 광야에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광야는 가나안으로 가는 유일한 관문이다.
광야는 「구약 영성의 훈련장소」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스라엘 야훼의 종교를 히브리어로 어근이 같은 4가지 종교로 표현하기도 한다:
「말씀 (다바르)의 종교」,「계약(브릿트)의 종교」,「지성소 (드비르)의 종교」,「광야 (미드바르)의 종교」인 것이다 (참고 이병렬, 원전 독해 시리즈 4).
『야훼 종교만이 하느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대화(말씀) 하시며 설득하시는 종교이다』라고 마르틴 부버는 말한다. 계약에는 언제나 쌍방이 있어야 한다. 즉 「대화」가 있어야 한다.
「지성소」는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후 예루살렘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설치했다 (열왕상 6, 5). 왜냐하면 『말씀의 궤』, 하느님의 말씀이 임재한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말씀」(다바르)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성소」(드비르)이다.
▲ 시나이 광야 「광야」는 반드시 지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자신을 정화하는 곳이요 순화시키는 장소이면 어디나 광야라 부를 수 있다.
자기를 비워야한다. 광야는 텅 빈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광야에서 하느님이 오신다고 외쳤다: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 이사야 40, 3). 은총의 대희년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모세처럼 겸손한 자세로 나의 광야 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