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말씀은 지난 주일의 복음말씀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부분으로, 이미 나왔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더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머물다」(9~10절 비교 4.5.7절)라는 말과 『열매를 맺다』(16절 비교: 2.4.5.8절)라는 주제어가 오늘 복음말씀에도 나온다. 오늘 말씀에서 새로운 점은 예수께서 하시는 『내 안에 머물라』는 말씀이 결국 그분의『사랑 안에 머물라』를 뜻한다는 것이고, 또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계명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그냥 단순히 『내 사랑 안에 머물라』『내 계명을 지켜라』『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매번, 당신의 예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의 앞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라는 말씀이 놓여 있고,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의 앞에는『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다.
그리고 특히『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는 말씀에는 앞뒤에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즉 앞에는『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이 덧붙여 있고, 뒤에는『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이 덧붙여 있다.
이렇게 하여 생명까지 내 놓으시며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제자들의「친구(형제) 사랑」의 근본동기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큰 질문이 하나 제기될 수 있다. 오늘 복음말씀에 의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으로 되어 있다 (요한 15, 12 참조 13, 34).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 「명령」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사실 이 질문은 오늘 복음말씀에뿐 아니라, 「최고계명」이 무엇이냐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이다(참조: 마르 12,28~34). 사실 「사랑」은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도 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위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명령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계명」이라는 단어를 구약성서의 오랜 전통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계명들의 기본줄기라고 볼 수 있는 「십계명」이 본디는 「열 가지 말씀」(deca-logoi→Decalogue)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십계명은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해방시키신 다음에 주신 「말씀」이었다(참조 출애 20,1).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께서 베푸신 자유에 잘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셨던 「말씀」들이었다. 기렇게 볼 때,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계명」의 근본정신은 결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얽어매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계명」은 「사랑」을 전제로 한 「말씀」이었다 . 이런 넓은 맥락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도 이해되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인간적 체험들도 생각해 보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즉 사랑하는 상대의 「뜻」앞에서 일종의 「의무감」을 느낀다. 그렇지 않고 자유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상대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는 이미 그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을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해 보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바로 이 「실행해야한다」는 의무성 때문에 「계명」이라는 말이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특히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절정에 이른 계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께서 고별만찬의 자리에서 당부하실 만큼 그렇게 간절한 예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상호사랑」은 그보다 먼저 있는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다면,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 사이에 오가는 충만한 사랑이 넘처 흘러,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흐르고, 그것을 또 제자들(믿는 이들)의 사랑을 토해 세상 곳곳으로 계속 흘러간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랑 안에 머물라』고 우리를 요청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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