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를 보면 가끔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엉뚱하신 것 같다. 하고많은 이스라엘 예언자들을 제쳐두고 이방인 왕이나 심지어는 저 멀리 메소포타미아의 한 점쟁이까지 동원시키시어 하느님의 계획을 일러주시는 일이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하기야 하느님만이 만백성의 주인이시요 창조주이시니까! 민수기 22~24장까지는 이방인의 점술가 발람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저주대신 오히려 복(福)을 빌어주는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22장에서는 동물 나귀가 말을 하는 것도 나온다. 성서에서 동물이 말하는 예는 창세기 3, 1~4절에서 뱀이 하와에게 말하는 것이다. 25장은 몇몇 다른 전승으로 이루어지고있다. 모압왕 발락은 시뽈의 아들로서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알려진 점술가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다. 발람은 브올의 아들이며 유프라테스 강변 브올에 살았다. 이 설화는 두 가지 전승, 즉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을 결합한 것이다.
야훼계 전승에서 발람은 미디안 사람으로 나온다. 발락의 청을 받아 가지고 가다가 길에서 천사를 만나 제지를 받아서 돌아가자 발락이 그를 찾아간다. 엘로힘계 전승에서의 발람은 하느님을 숭배하는 아람의 점쟁이로서 모압왕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것으로 나온다. 발람이 모압에 왔을 때 발락왕은 발람의 요구대로 번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발락의 의도와는 달리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위하여 축복을 네번씩이나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방인 발람이 이스라엘의 야훼를 알았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네 가지 계시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발락의 계획이 헛된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는 백성을 자신의 힘으로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23, 7~10). 그러나 신약에서 (베드로 후서 2, 15 유다서 1, 11) 발람을 「부정한 수단으로 이득을 얻기 좋아한 사람」, 「욕심꾸러기」로 평하고 있고 묵시록 2, 14절에서는 브올에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성적추행을 발락에게 권하는 책임자로 묘사되어있다.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 사람의 손에 걸려서 죽음을 당한다( 31, 8 여호수아 13, 22).
우리 인간의 말에는 「축복」아니면 「저주」 둘 밖에 없다. 『축복하다』는 말은 라틴어로 Benedicere ( 좋게 말하다 ), 『저주하다』는 말은 Maledicere (나쁘게 말하다) 이다. 우리는 눈만 뜨면 입을 열기 시작한다. 말없이 하루를 살지 못한다. 무수히 뱉아 내는 내 말의 씨앗에는 축복 아니면 저주 이 둘 중의 하나가 들어있다. 쉽게 말해서 좋은 말은 모두 축복이고, 좋지 않은 말은 모두 저주가 된다. 복을 빌어주는 것, 축복은 우선 자기 자신이 복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 저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만일 누구를 저주한다면 우선 내 마음의 내면에 저주의 씨앗이 싹터서 나오기 때문이다. 복된 상태에서 저주가 나올 수 없다. 복은 복을 낳고, 저주는 저주를 낳는다. 이는 마치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다.
20여년 전에 양파실험을 한번 직접 해 본 적이 있다. 두개의 양파를 가져다가 그 중 좀 덜 싱싱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주었다. 같은 장소에 두고, 같은 시간에 똑같이 물을 주었다. 단지 관심만 다르게 하였다. 싹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던 양파는 나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놀랍게도 예쁜 싹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싱싱하고 금방 싹이 나올 것 같던 양파는 반대로 한두 가락 겨우 마지못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관심과 축복을 받은 양파는 너무나 잘 자라 키가 클 대로 잘 자랐다. 그러나 『저기에서 싹이 나오면 어쩌나』하고 싹이 안 나오기를 바라는 나의 저주를 받은 양파는 결국 비참하게도 통째로 폭싹 썩어버리는 것을 체험하였다.
이것을 보면서 양파가 섞은 것보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안에 축복과 저주의 씨앗이 확실히 공존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어떤 묘한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짐하였다. 모든 것에 축복만 하기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사건, 모든 것에 주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길! 복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 야훼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다. 우리 인간은 복을 받기 위하여 기도드릴 뿐이다. 이것이 축복이다.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을 비는 자들이라 해야하지 않을까?!
예루살렘에서 공부할 때 매일 한 두 명의 거지를 만나게 된다. 사탕하나라도 드리면 유다인 경우 야훼하느님의 복을 빌어주었고, 「십자가의 길」에 앉아 매일 구걸하던 팔레스타인 할머니는 하늘을 우러르며 늘 내게 알라신의 복을 빌어주었다. 기숙사에서는 여러 나라의 수도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13남매 가운데서 9명이 수도자라는 폴란드 출신의 데레사 수녀님은 저녁마다 내가 안약을 넣어드리면 언제나 『살렘 이데끼!』 (네 손에 복이 있기를!)라며 내 손에까지 축복해 주었다. 그들은 아무리 작은 친절, 작은 도움이라도 받으면 꼭 복을 빌어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렇게 복을 빌어준다면 우리세상은 천국으로 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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