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의 고질병이라는 지방색은 심히 유감스럽게도 지난번 16대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심지어 같은 선거구 안에서도 후보자가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몰표가 엇갈리는 현상까지 있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왔다. 고향에서 오히려 배척받으셨으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다가 어느 날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하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지혜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가 행했다는 기적들에 대하여도 듣고 경탄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믿지는 않았다. -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이러하다.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완전히 다 알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신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마리아의 아들」인 「그 목수」에 불과하였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바로 이 선입관이 예수가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들의 「굳어진 마음」과 선입관이 그들을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게 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앙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 『예수께서는 거기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고, 단지 병자 몇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이다』(200주년 성서). 이 말씀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이 철저히 「믿음」을 향해 있고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믿음이 아예 없거나 믿을 마음 자세마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신앙은 없이 놀랄만한 기적만을 요구하는 요청은 늘 거절하셨다. 지난 주일 복음에 나왔던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혈하는 부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잘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구원행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뢰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이 박혀있는 「선입관」 및 「굳어진 마음」에 대하여 반성하게 된다. 두 가지 방향에서 반성을 하게 된다. 하나는 주님께 대한 태도와 관련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반성이다.
첫째로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먼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믿을 수 있도록, 주님을 향하여 「굳어진 마음」을 풀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반성을 하게된다. 혹시 우리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에 관하여 이미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이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 관계가 건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상대의 새로움에 대하여 알려고 해야 하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분께서 새로 베푸시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각오할 필요가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스럽게 오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십자가와 같이 매우 약한 모습으로 오실 때도 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편안한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정도로만 믿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복음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 특히 우리들이 평소에 그들에 관하여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혹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있다면, 그 선입견을 접어두고, 가능한 한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순수한 모습을 보도록 노력하고, 그들이 그 방향에서 주님을 향하여 성숙하도록 도와주어야겠다.
한 인간과 한 인간의 관계에서 위기는 바로 서로가 상대에 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더 이상 상대에 대하여 더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많은 결혼생활의 위기는 바로 이런 관계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우정은 「所有적 사랑」이요, 「소유적 우정」일 경우가 많다. 여기서 소유적 사랑이란, 상대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상대에게 조금도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가지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태도를 말한다. 상대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강요하는 이런 태도는 상대를 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이는 참 사랑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물건처럼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고귀한 존재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도, 심지어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유」하려는 사랑은 위장된 사랑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그 상대가 「자기의 고유성」을 가지도록 존중해 주고, 상대방의 다른 점을 사랑으로 수용한다.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소유적 사랑」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들은 『예수가 우리 고향 사람이니 당연히 그는 누구보다도 우선 우리 나자렛 고향 사람들을 위하여 기적을 하겠지』하고 기대하였던 것 같다. 예수님이 가신 참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들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이 「소유적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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