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에서 어느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예수님의 이 치유행위는 오늘 주일 제1독서에도 나오는 다음의 예언을 회상시키는 것이었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 5). 복음사가는 이 치유 이야기를 통해 기다렸던 「메시아 구원의 시대」가 드디어 다가왔다는 것을 선포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은 육체적인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뿐만 아니라, 영적인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아무리 기적이 많이 일어나도 「믿지 않으려 고집을 부리는」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눈은 있어도 보질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를 못하는 사람』(참조: 이사 6, 9~10 마태 13, 14~15)이라고 탄식한다.
아무리 우리의 귀가 건강하여 갖가지 소리를 잘 듣는다 하여도 정작 우리가 듣고 따르며 실천해야할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귀머거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우리가 건강한 입과 혀를 가지고 있다 하여도 우리의 입에서 탐욕스러운 말이나,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한 말이나, 남의 삶에 독침을 쏘는 듯한 말만이 나간다면, 우리 또한 「참된 말」을 할 줄 모르는 벙어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우리의 눈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이웃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세, 영예만을 본다든지 또는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줄 모른다면, 우리 또한 하느님 앞에서 눈뜬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많은 경우에 우리들 자신도 영적으로 여러 가지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깨닫고,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마음과 눈과 귀로 다른 사람들, 특히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다가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치유하실 때 『에파타!』(「열려라!」를 뜻하는 아람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열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차갑고 굳게 닫아걸고 있다면, 더욱 더 그렇다.
『차가운 네 마음을 열어라!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어있는 네 눈을 떠라! 들어도 듣지 않으려는 네 귀를 열어라! 진리와 사랑의 말이 잘 나오지 못하는 반벙어리가 된 네 입과 혀를 열어라!』
여기서 세례예식 때 들은 적이 있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교회는 오랜 옛날부터 어린이 성세예식 때 (흔히 생략하기도 하지만) 이른 바「에페타」예식을 가져왔다. 세례예식을 거의 마치면서 세례받은 어린이의 귀와 입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여,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천주성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세례 때 들었던 이 말씀을 우리가 지금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하겠다.
지금까지 위에서는 주로 우리 인간 편에서 마음과 눈과 입을 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자세에 앞서야 하는 더 중요한 태도가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귀먹은 반벙어리」가 체험한 것처럼, 우리가 당신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열어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 있기 전에 이미 주님의 사랑이 앞서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의 희망의 근거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즉 대화를 해가면서 「인간」이 되어간다. 핏덩어리 갓난아기가 하루하루 자라나 어느덧 『엄마! 아빠!』하고 말을 걸어오면 그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하는가? 그런데 사실 그 맑은 소리의 아기의 부름은 그 아기 엄마 아빠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그 아기가 그렇게 엄마 아빠를 부르기 전에 먼저 그 아기의 부모가 사랑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가 수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수없이 부르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 우리의 「부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오늘 주일의 복음 말씀의 정신을 잘 담고 있는 어느 기도를 인용한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시어 신앙으로 부유케 하여 당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천주여, 길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여, 기도할 힘을 잃고, 기도할 수 조차 없는 병든 인간이 당신 기적의 능력과 은총으로 당신을 한없이 찬미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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