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신유박해 순교자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는가. 신유박해의 순교자 가운데는 한국교회의 기초를 닦고 신심의 뿌리를 내려줄 뿐 아니라 훌륭한 인격과 덕망 높은 인물들이 많다. 그 중에서 상당수의 순교자들이 교회법으로 공적인 공경을 받는 성인이 아니면서 이미 신앙 공동체의 정서 안에 성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만약 이 분들이 교회의 기초를 견실하게 세우지 못했다면 한국교회가 100년의 박해를 견뎌냈겠는가. 신앙의 기초를 닦는 일에 출중한 공덕을 남긴 예로서 최창현이 오늘의 「매일미사」에 견줄만한 말씀의 전례서인 「성경직해광익」의 기본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초기교회 때부터 신도 대중이 하느님을 마주하고 대화하듯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에 뿌리를 둔 신앙을 다질 수 있었으며, 정약종이 아녀자들까지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한「주교요지」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신도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알고 믿으며 증거하는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순교자들의 삶이 성스러운 것은 깨달음을 실천한 굳은 의지력과 강한 용기에 있었다.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삶을 읽으며 자각할 것은 무엇 인가? 선조들의 신앙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기 진단에서 시작되고 유지된 점이다. 조상들의 신앙은 인간의 목숨이 깨지기 쉬운 유리병보다 허망하다는 자각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는 불멸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 뿐 아니라 영혼을 자각하며 영원히 사는 길을 알게 되었다. 영혼의 일차적인 자각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었다. 하느님의 모상인 영혼을 가진 모든 인간은 하느님처럼 존귀하다는 것,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빈부의 차이나 신분과 남녀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래서 순교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존엄함과 평등함을 부인하는 기성사회의 틀에 극단적인 저항이었다.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된 인간의 몸의 존귀함과 신성함은 신앙 안에서 더욱 확실했다. 성체를 모신 그리스도인은 곧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신도들은 성체를 몸 안에 모시므로 그리스도가 사람의 살과 뼈와 세포에 살아 있으므로 신도의 몸을 신신(神身)으로 인식했다. 조상들은 하느님을 과학의 지식으로 찾지 않았다. 하느님은 인류라는 자식을 낳은 부모이며,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만물을 운영하며 수고하시는 부모로 인식 했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없었다면 아무리 내세의 천당이 황홀하다하더라도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뎠겠는가. 평소 선조들이 하느님이 계시다는 큰 바위같은 믿음과 신뢰심이 없었거나, 하느님을 가슴과 체온으로 느끼는 정서가 없었거나, 사랑 위에 세상을 세우셨으므로 사랑이 삶의 원리라는 믿음이 약했다면 신유박해로 폐허가 된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신유박해가 끝나자 신도들은 다시 모여 신앙 공동체를 재건했다. 그리하여 가장 이상적인 교회인 사도시대의 초대교회를 방불케 한 교우촌이라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신유박해 순교자의 영성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영성 이라면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 외형적 팽창주의·성장주의, 물량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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