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여기서 논하는 사랑은 대신덕인 애덕(愛德)을 가리키고 있다. 즉 신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애덕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애덕은 하느님께서 신앙인에게 은총으로 부어주신 덕성(德性)으로서 하느님을 하느님 자신 때문에 사랑하고 우리 자신과 이웃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덕이다. 이 단순 소박한 정의를 풀어서 생각해 본다.
애덕의 대상 애덕은 인간이 하느님께 직접 나아가게 하는 덕이므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닦을 수 있는 덕이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대신덕이므로, 그 직접 대상은 만선(萬善)의 근본이신 하느님 자신이고 그 다음 대상은 하느님의 선성(善性)에 참여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천사, 인간) 들이다.
애덕의 동기 애덕의 동기도 하느님 스스로의 지선(至善)하심 때문이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느님 자신이 만유위에 사랑받으실 완전한 선이시기 때문이다. 신앙인이 애덕 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동기도 지선하신 하느님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해야 그리스도교적 애덕이 성립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경우와 사람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경우가 그 대상이나 형태가 다를지라도 두 경우에 사랑 하는 동기가 동일한 하느님이기 때문에 같은 애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되 그 동기가 하느님이 아닌 다른 피조물이나 다른 이유라면 대신덕인 애덕이 아니고 박애(博愛, Philantropia)라 한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그리스도교적 애덕이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이며 서로를 위해서 선을 원하는 사랑 이라 하였다. 이렇게 애덕은 그 대상과 동기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신덕과 망덕 처럼 상한선(上限線)이 없다. 즉 하느님을 너무 믿거나 하느님을 너무 바라거나 하느님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하느님을 열심히 믿거나 간절하게 바라거나 극도로 사랑 해도 지나치게 믿고 바라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무한자(無限者)이신 하느님이 대상이고 동기인 신덕 망덕 애덕은 현세에서 부족하기가 쉽지 넘치는 수가 없다. 흔히들 하느님을 「너무 믿는다」「너무 바란다」「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상 잘못 믿고 잘못 바라고 잘못 사랑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인간 사이를 도덕적으로 조정하는 윤리덕 들은 덕재중용(德在中庸)이라는 규범 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을 사랑해도 하느님을 동기로 해야 애덕이 된다면 사람을 동정해서, 그 사람이 내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여, 그 사람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불쌍해서, 그 사람과 더 친해지려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윤리적인 선행이 될 수 있지만, 그 선행이 결코 애덕이 될 수는 없다. 진정한 애덕은 하느님 자신을 동기로 하는 사랑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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