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 되심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으므로 그분의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가 예언한 「남은 자」와 같은 이들로서 창세기에서 성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낙관적인 약속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또한 경제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빈궁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가난을 의미한다.
즉 자기 자신의 영적인 빈곤을 알아 오직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가난이야말로 복된 가난이며(마태 5,3) 인간의 처지를 잘 알아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도 통한다. 겸손은 교만과 반대며 모든 덕의 기초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주님은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가 1,46-53)라고 노래한 성모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9, 23). 이는 예수님께서 부(富) 그 자체를 단죄하셨다기 보다는 구원을 가로막는 부의 위험을 경고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금력(金力)은 마력(魔力)으로 둔갑한다. 이는 하느님과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니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부자 청년은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하느님께 마음이 송두리째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은 포기된 그것이 고귀하고 행복의 근거가 될 때에만 훌륭하고 가치있다. 재물의 포기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4) 자기 극복 및 수행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강조하셨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완화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비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강조하셨지만 느슨한 삶은 경고하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 24)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마태 7,21-23)라고 분명히 하시면서 올바른 윤리생활을 강조하셨다.
윤리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간이 되게 한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나선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자기 포기를 강조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4참조 마르 8, 34-38). 어떤 의미에서 영성생활이란 수행의 삶이다. 세례자 요한은 정의를 요구하였다. 군인들은 정당한 임금으로 만족하고 세리들은 정당하게 세금을 받고 일반 서민들은 자선을 실천해야만 했다(루가 3, 10-14).
그러나 예수님은 이보다 더 엄하게 요구하셨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까지도 포기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 25-26). 이런 가르침들을 볼 때 주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올바른 윤리생활을 영위해야 하고 그분을 좀 더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자기를 끊는 수행생활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행자(修行者)의 삶을 사는 것인데, 이를 통하여 그분의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그 수행의 행렬은 그분이 외치신 이래 약 2천년이 지나도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으니 신기하기만 하다. 그분의 말씀에 매력을 느껴 그분을 따라나서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복이 있을진저!
(5)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요한 3, 16)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이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하느님은 만민의 아버지이시다. 이 보편적 부성상은 우선 대자대비하신 아버지로 드러난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그리고 어떤 죄인이라도 뉘우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그분께 나아가면 다 용서하신다(루가 15장). 그분은 예수의 아버지시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사가들은 부자 관계를 대단히 친숙하게 표현한다.
아드님은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셨고 찬미 감사드렸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마태 11, 25)라는 고백에서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정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버지 하느님은 아드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다(마태 11, 27). 그러므로 아드님은 자신 있게 이렇게 천명할 수 있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마태 19, 32). 심판과 연관시켜 루가도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권을 주신 것처럼…』(루가 22, 29). 한 걸음 더 나아가 루가는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친숙한 부자 관계인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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