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원시교회와 사도들의 활동
⑦ 세상
사도 성 요한이 말하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 소 모호하게 표현된 이 세상은 확실히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세상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악마의 지배를 받을 때는 심판과 단죄의 대상인 세속이 되어 버린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파견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세상을 판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3, 1712, 47). 그분은 세상의 구세주(4, 42)이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6, 33. 51)과 세상의 빛(87, 12)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9, 39)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심판을 받았으며(12, 31) 이 세상의 권력자가 쫓겨남으로써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⑧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요한 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 개념이다. 그 빛이 어둠에 반대 되는 이원론은 아마도 복음사가가 그 시대의 헬레니즘에 침투된 영지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유다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기초에 뿌리를 둔 사상이다. 빛은 하느님의 성질을 나타내는데 비해 어둠은 하느님의 구원과 요구에 대한 무지를 나타 낸다.
따라서 그것은 죄의 원인이다(욥기 18, 5~624, 13~17로마 13, 12에페 5, 8 등). 사막의 수도공동체였던 쿰란에서 발굴된 문헌 중의 한 제목은 요한 복음의 이 주제와 비슷한 어둠의 아들들을 대항한 빛의 아들들의 전쟁이다.
이것은 다음 번의 소제목에 나오는 생명과 죽음의 대립 개념과 같은 것이다. 빛나고 생명을 주는 로고스(그 말씀)가 세상에 들어올 때 어두움은 힘을 잃고 비실비실 물러가 버렸다.
세상을 자기의 예속하에 두고 통치하던 그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1, 5). 『나는 세상의 빛이다』(9, 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빛 안에 걷는 자이다.
이는 『사랑 안에 사는 것』이고 『진리를 따르는 것』(3, 21)이며 『세상의 빛』(9, 5)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이신〔(11, 25) 그분 안에 사는 것이다.
반면 『어둠 속에서 걷는 자』는 『불신』과 『악의 길』에 들어서 있으며 『반그리스도적』으로서((3, 19) 진리를 저버리는 악마의 자식(8, 43) 에 속한다. 이런 자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참된 것을 보지 못하며 탐욕과 자기과시와 만족에 빠져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비슷해진다(9, 40~41). 지도자가 빛이 아니라 어둠으로 차 있을 때는 착한 목자가 아니라 삯군이 되어 버린다(10, 11~12).
⑨ 새로 태어남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나눈 대화에서 생명은 『위로부터 태어남』(3, 1~13)이며 이는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에 의한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세례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다. 세례는 물에 잠기고 씻음으로써 과거의 생활을 씻어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메시아 시대의 징표로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영이 풍성하게 임하신다(이사 44, 359, 21 즈가 12, 1 요엘 3, 1). 영이 풍성하게 임하시고 넘쳐흐르면 사람에게 참된 내적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도록 해주리라. 그들의 몸에 박혔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리라. 그래서 나의 규정을 다르고 나의 법을 지켜 그대로 실행하도록 만들겠다. 그제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11, 19~20).
천상 실체인 성령을 통하여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관계 안에서 지상의 실체인 물을 사용하여 새롭게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야곱의 우물에서 성령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흘러 들어갈 생명을 더 깊이 설명하고 있으며 베짜다 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준 치유사화(5,1~9)에 이어 구원을 목말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샘솟는 물을 강물처럼 흘러나게 하시는(7, 38~39) 주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 원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⑩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6장에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스스로 생명의 빵이라는 선언을 하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빵을 먹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6, 54)라고 하셨다.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빵과 음료로 선언하신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이를 재확인 하셨다.
교회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를 성체로 믿고 거행하며 제일 큰 성사로 인정한다. 그리고 이를 거행하는 전례는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예수님 자신이 먹히는 빵이라는 선언은 참으로 신비이며 이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분의 인격을 믿고 이를 받아들이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제자들이 그분을 떠난 사실 (6, 60~66)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분이 먹히는 빵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그분을 먹을 수 있는 잇점이 있는 동시에 조심하지 않으면 고린토 교회 공동체의 일부 신도들처럼 크게 잘못할 수도 있다(1고린 11, 17~34). 그분을 잘 모시는 이는 그분의 힘으로 살게 됨을 우리는 믿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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