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는 위대한 성인이다. 그는 500여년 전 영국에 태어나 학자로서, 가장으로서, 법관 으로서 그리고 수상으로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생을 사랑했고 세상을 멋지게 살면서도 성인 이었던 것이다.
그가 성인인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진리를 위하여 단두대에 목숨을 내놓을 만큼 영웅적이어서 일까? 교회의 형식 절차에 따라 시성되었기에 그렇게 인정되는 것일까? 그가 성인 인 이유는 무엇보다 일상에서 은총에 협력하면서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고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로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극도의 시련인 죽음은 그러한 일상적 거룩한 삶을 세상에 밝혔을 뿐이다.
1. 생애
토마스 모어는 1478년 2월 6일 런던에서 법관이던 죤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2세에 종교계 및 정계에 명망을 얻고있던 모오튼 대주교의 문하에 시동(侍童)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지내는 동안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4세에 옥스퍼드에 입학하였고 뉴 인과 린카스 인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500년 약관 22세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도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졌던 문학 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아 고전 작가 들을 열심히 연구하였는데 그것이 평생의 취미가 된다.
3년간 훠니벌스 인에서 법학 강의를 했고 1504년 중의원에 들어갔다. 이 무렵 수도생활에 마음이 끌렸으나 숙고 끝에 자신에게 그 성소가 없다고 판단하고 1501년 제인 콜트와 결혼했다.
모어는 런던에서 변호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상법전문가로 명성을 얻게되었고 런던시의 전속 법률가가 되어 공정함과 빈곤계층을 위한 헌신적 봉사로 시민들 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1511년에 네 자녀의 어머니인 그의 처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얼마 후 연상의 미망인 앨리스 미들튼과 재혼한다. 첼시에 있던 그의 저택은 지성인 생활의 한 중심이 되어 에라스무스, 콜렛, 그로우신 등 유명한 학자들이 운집했다.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1509) 그의 화려한 정치 및 외교 경력이 펼쳐진다. 1510년에 런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고 1515년엔 플란더 스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 임지에서 그는 유명한 저서 유토피아 를 쓴다. 1518년에 민원관과 추밀 참정관을 겸임했고 3년 후엔 기사로 승격되었다.
1523년엔 중의원 의장과 케임브리지 및 옥스 퍼드 대학교의 이사직을 겸임했으며 1525년에는 랭카스터 공작령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529년 그의 나이 51세에 제국의 대법관(Lord chancellor: 당시 최고법관인 동시에 수상 격인 으뜸 벼슬)에 임명 되었다. 왕과의 좋은 우정은 토마스 모어의 직분과 함께 날로 명성을 높게 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심경과 처신의 변화와 함께 모어에게 큰 위기가 닥쳐오게 되었다. 훌륭한 왕의 품격을 갖춘 인물로 존경받던 헨리 8세의 즉위는 전 유럽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 런던에서는 그를 부와 금 은 보석을 탐하지 않고 불멸의 명예와 덕을 추구하는 국왕으로 추앙했다. 헨리는 속사(俗事)에 이르기까지 교황권을 지나치리 만큼 옹호하였으며 그는 한편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명예를 얻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던 그 무렵 그는 칠성사 옹호론을 쓸 만큼 교회의 신앙에 열정을 드러 내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뒷날 교황에 대적하게 되고 잔인하며 탐욕적이고 포악한 살인을 자행하는 폭군이 될 줄 어찌 누가 예견했겠는가.
헨리 8세는 모어의 능력과 인품을 잘 알았기에 그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적절이 등용했다. 따라서 모어는 그에게 중요한 정치적 조언자 및 협력자, 복잡한 외교 문제의 해결사 뿐 아니라 문학, 철학,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호쾌한 대화 상대자였다.
모어의 운명은 왕의 이혼 송사로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헨리 8세는 그의 형 아서가 어린 소년으로 결혼했던 스페인 왕실 출신 아라곤의 가타리나와 결혼하였다.
형수와 결혼했을 때 헨리의 나이는 겨우 열 두 살이었으며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한편 헨리 8세는 가타리나에게서 해방되길 원하면서 새로운 왕비로 궁녀인 앤 볼라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학자들에게 가타리나와의 결혼의 무효에 대하여 연구하게 하고 다른 한편 교황 청에 대표단을 파송해 특별 관면을 통해 합법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이 거부되자 그때까지 가톨릭 신 앙의 수호자라 일컬어지던 그가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의 고위 성직계를 강압하여 첫 결혼을 무효화하게 하고 앤을 정식 아내로 선언하게 하였으며 자신을 중의원의 의결에 따라 영국 교회 와 성직자들의 유일한 보호자이며 최고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했다.
1532년 5월 15일의 일이다. 이로써 영 국 성공회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모어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건강을 구실 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왕은 지극한 유감을 표시하면서 사표를 수리하였다.
그 사이에 가타리나는 궁정에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고 1553년 5월 앤은 영국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의 책봉식에 초청 받은 모어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어는 왕의 행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았으며 침묵을 지 키고 있었다. 어느 날 모어의 친구인 노오포크 공작이 찾아와 위협 담긴 충고를 하였다. 토마스, 우리는 함께 국왕을 위해 일하지 않았던가. 군주의 분노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모어는 그에게 분명한 소신을 표명했다.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다면 자네와 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네. 내가 오늘 죽는다면 자네는 내일 죽게 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그는 모반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이던 사람이 런던 탑의 감옥에 갇혔다.
그 때는 1534년 4월 17일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모든 수입을 잃었고 부동산은 몰수 당했으며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쳤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다. 그는 감옥에서 헨리 8세와 앤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의 왕위 승계를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요청 받았다.
서약문을 자세히 검토하면서 그는 거기에 서명할 경우 왕을 영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또한 승인하는 데 동의하는 것임을 알아 차렸다. 그는 서명을 거부하면서 이 렇게 말했다. 내 양심은 나에게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합니다.
그러나 국왕의 대주교 권을 승인하는 것은 내 영혼이 영원히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서약할 수 없습니다적대자들은 모어가 완전히 좌절하여 스스로 포기하도록 집요하게 박해하였다.
감옥 안에서 집필을 방해하기 위해 펜을 빼앗았고 책도 차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심문은 불시에 반복되었고 식사량이 점차 줄었다.
그의 가족 들도 조직적으로 가난에 쪼들리게 하였다. 그는 류마티스가 도져 고통을 겪었으며 건강이 많이 약화되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유모어를 잃지 않았다.
모어는 자신의 종말을 수난에 대하여라는 글로 준비하며 쓰던 중 책, 필기도구와 함께 지니고 있던 모든 물건들을 빼앗겼다. 그는 숯 한 토막으로 자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너희들 어느 누구도 기도 중에 잊지 못하는, 사랑에 넘치는 너희 아버지가 한 토막의 숯으로 썼다. …자 이제 종이도 끝이 나니 잘 들 있거라.
우리 주님께서 너희를 항상 참되고 의리 있고 정직한 사람으로 지켜주시길 빈다그는 단두대 위에서 평화를 잃지 않으면서 잠시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난 후 그에게 용서를 청하는 형리를 포옹한 다음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둘러 서있는 이들에게 왕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선언했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앞서 하느님의 신하로 죽는 것입니다 그가 타워 힐에서 참수된 날은 1535년 7월 6일이었다.
1886년 정부 문서 공개로 모어의 행적이 정확히 드러남에 따라 시복조사가 시작 되었고 같은 해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35년 5월 20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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