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성체의 성인」, 「고해소의 성인」, 「본당신부들의 수호 성인」등으로 불리는 성 요한 비안네는 모든 본당사제들의 귀감이다. 그는 사목업무의 활력을 매일의 미사성제와 성체 대전에서 머무는 긴 시간의 기도를 통해 얻었으며 그 활력의 은총을 통해 본당 공동체의 쇄신과 신자들의 재복음화, 순례자들의 성화에 투신하며 기여할 수 있었다.
그의 모든 사도직의 중심인 사랑의 성사 성체성사에 참여 하기 위한 준비는 회심과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임을 강조하면서 그에 인내로이 초대했던 비안네 신부는 본당 공동체를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에서 가까운 마을 다르딜리에서 아버지 마태오 비안네와 어머니 마리아 벨루제의 일곱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1789)과 그 여파로 인해 사회가 혼란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아 곤경에 처해있던 시대에 청소년기를 지낸 요한 비안네는 학교 교육이나 본당의 교리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여건 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는 가정에서 일찍 기도하는 것을 배워 혼자 조용히 기도하길 좋아했다.
그는 13살 되던 1799년 이웃마을 에퀼리에 보내져 교리 공부를 한 후 첫 영성체를 하였다. 박해의 상황이었기에 첫 영성체 날 미사는 건초로 창문을 가려 놓은 한 농가에서 그로보즈 신부에 의해 집전되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사목활동하던 그 신부의 담대한 용기는 비안네 소년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때부터 그의 마음 안에 사제 성소의 싹이 텄다.
마을에 공립학교가 세워지면서 비안네는 늦은 나이지만 어린이들과 함께 기초 공부를 하였다. 그는 부모를 도와 밭일을 해야 했으므로 학교에 자주 결석했지만 두 해에 걸쳐 프랑스어 읽기와 쓰기 등을 배워 그 지역 사투리만 알던 그가 이제 표준어인 프랑스어로 어느 정도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는 푸루니에 신부로부터 교리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 신부와 친해지면서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더욱 커갔다.
1806년 그가 스무 살 되던 해 신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에퀼리에 있는 발레 신부를 찾아갔다. 기초교육도 제대로 안 된 시골 젊은이를 면담한 그 신부는 의외로 흔쾌히 예비 신학생으로 받아 들였다. 그곳에서 비안네는 주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근 3년 공부하던 그는 군복무 관계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1811년 3월 발레 신부에게 돌아왔다.
3개월 후 발레 신부는 쿠르봉 부주교에게 비안네를 사제 지망자로 추천했고 다음해 그는 리옹 교구의 신학생으로서 베리에르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기초 교육의 미흡과 라틴어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철학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는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없어 발레 신부에게 돌아가 언어와 신학 공부를 보충해야 했다.
1813년 비안네는 리옹의 성 이레네오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라틴어로 진행된 수업 때문에 다시 어려움을 겪던 그는 시험 결과가 좋지 못해 학업능력 결격자로 판정되었고 결국 추천 신부에게 되돌려보내졌다. 그 결정은 최종 탈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추천 신부가 그에게 사제가 되는 데 기본적 으로 필요한 신학을 가르친다면 그의 사제 성소를 재검토 할 수 있다는 특례 조항이 첨부되었다.
발레 신부는 라틴어 아닌 프랑스어로 그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한 그는 시험관 앞에서 프랑스어로 시험을 쳤고 드디어 무난한 평가를 받으며 통과되었다. 그리고 1814년 7월 2일 그는 감격스럽게 차부제품을 받았다.
발레 신부한테서 계속 공부한 그는 다음 해 6월 23일 부제품을 받았다. 비공개로 진행된 마지막 시험을 친 후 같은 해 8월 13일 사제성품을 받았다. 그러나 고해성사 집전권이 유보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발레 신부는 비안네를 자신의 보좌로 맡겨 주길 요청함으로써 사목실습을 도울 수 있었고, 한편 새 사제가 고해성사 집전권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 일년이 채 안되어 문제를 해결했다.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는 그의 스승이며 아버지이고 주임인 발레 신부였다. 1817년 12월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비안네는 다음 해 2월 11일 아르스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이틀 후 부임했다. 주민이 230명에 불과한 아르스의 교우들은 대다수가 세상사에 쫓기면서 신앙엔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
비안네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공동체의 회심을 위해 자주 금식 고행을 했고 매일 긴 시간동안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에 대한 친절과 자비심은 그에게 있어서 언제나 금식이나 어떤 고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 봉헌, 고해 성사 등으로 하루 중 10시간 이상 성당과 고해소에서 지냈으며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 강론 및 교리 강좌 준비를 하였다. 몇 년 후 아르스 본당은 그가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공동체가 되었다.
1824년에 그는 「섭리」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것은 소녀들을 위한 무료학교였는데 장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해야 할 소녀들이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교육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선 교사들을 양성하여 그들에게 쓰기, 읽기, 셈하기 뿐 아니라 요리, 집안 살림, 정원 가꾸기, 바느질 등을 가르쳤다. 곧 기숙사 시설도 갖추었고 고아원도 함께 운영하면서 교육시켰다. 그는 이러한 시설들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곤경 중에 기적 같은 일들을 가끔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뜨겁게 느꼈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비안네 신부의 단순하면서도 감명을 주는 신앙강좌를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1838년에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성 가정 수도회에 맡겨 교육하도록 했다.
1823년 1월에 샤르트르회 신부들이 아르스에서 멀지 않은 트레부라는 곳에 피정 선교단을 보냈는데 비안네 신부도 그 일원이 되어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 활동을 마치고 돌아 온 후 그의 성덕과 카리스마에 대한 평판은 그 주변 뿐 아니라 점차 리옹에까지 퍼졌으며, 1826년부터 순례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아르스를 찾아왔다.
비안네 신부는 그 후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씩 봉사해야 했다. 아르스의 시장 프로스페르 데 가레 백작에 의하면 183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순례자가 3만에 달했다.
순례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비안네 신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그들이 아르스에 오는 목적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자기를 보러 온다는 부담감이었다. 그러던 중 아르스가 순례지가 되도록 하는 공적인 이유를 마련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찾아냈다.
그가 평소 공경하던 성녀 필로메나 순교자의 경당을 지어 그곳에서 순례자들이 성녀의 중재 기도를 청하며 회개하여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는 은총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안네 신부는 튼튼한 몸을 타고났지만 엄격한 수덕생활과 충실한 사도직 업무 그리고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과로하게 되어 점점 쇠약해졌다. 그러나 그가 움직일 수 있던 날까지 일상적 본당 업무, 소년,소녀들을 위한 학교 운영, 교리교육, 환자 방문, 고해성사, 상담 등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73세이던 1859년 8월 2일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렸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 된 그를 비오 11세는 1928년 4월 23일 시성했으며 1929년엔 「본당신부의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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