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돼 번영했던 것은 세 단계로 볼 수 있다. 첫째 당.원(唐元)시대, 둘째 명·청(明淸) 시대 셋째는 근대(19세기) 이후이다. 16세기말 루지에리, 리치 등 선교사는 중국인이 원하는 방법으로 중국 상류층에 접근했고 리치는 1610년 북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전체에서 2500여명의 신자를 얻었다. 그러나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까지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일어난 중국의례에 관한 논쟁은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불러왔다.
즉 예수회 선교사 리치와 동료 선교사들은 중국 선교에 있어서 중국 의례, 곧 조상 숭배와 공자 숭배를 중국 문화와 관련된 의식으로 파악하고 이를 허용했다. 이보다 늦게 중국에 진출한 다른 수도회 선교사들이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에 반대했고 이에 대해 교황청은 이러한 중국 의례가 일체 미신적인 것이라고 판정을 내려 중국인 신자가 여기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중국 황제는 이에 대해 외국인이 중국의 전례를 비난하는 것으로 간주해 전례를 부인하는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1724년 옹정제는 금교의 조서를 내렸다. 이후 1844년까지 박해시기가 이어졌다. 그후 미약하나마 전교활동이 진행 됐으며 복건(福建) 박해를 위시해 120여년간 대소 박해가 있었다.
18세기말 이슬람 교도나 백련교(白蓮敎)의 반란은 합법적인 종교에 대한 당국의 의심을 사 엄중한 단속을 받았고 천주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가톨릭은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의 보호 아래 다시 전교활동에 나서 프랑스는 황포조약(1844년) 이후 중국에서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해금이 되자, 서방국가들은 외국인 선교 지역이 5개 항구로 묶여 있는 것을 풀고자 시도하여 천진조약, 북경조약으로 이를 달성했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은 엄청난 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 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에 시성되는 성인들 중에서도 의화단 사건으로 순교한 성인들이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된다. 이후 20세기에 이르러 전교가 활발해져 1939년 신자수가 318만명에 이르렀으나 공산화된 이후 정부의 통제를 받는 애국회가 창립돼 실제 신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고 정부는 중국 교회를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억압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