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적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신앙, 그리고 이웃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동지로, 인생의 반려자로 김대통령과 함께 해온 이희호 여사의 말이다.
『나는 어느새 이불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1981년 2월 청주 교도소에 수감됐던 김대통령의 옥중서신의 한 구절은 신앙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인간 김대중
『투옥과 암살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에 헌신해왔다』(99년.미국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한국 민주화과정에서의 역할, 남북 화해정책으로 북한 사회의 인권 개선에 기여했다』(2000년.노르웨이 라프토인권상). 김대통령이 그간 수상한 브루노 케리스키 인권상(81년), 유엔인권협회 인권상(98년) 등의 국제인권상들은 민주화와 남북화해 협력을 위한 그의 인생 역정을 잘 보여준다. 「다섯번에 걸친 죽을 고비와 6년간의 감옥살이, 55차례의 연금, 10년의 해외 망명생활」. 온갖 좌절과 고난을 넘어 민족화해의 물꼬를 튼 그의 삶에는 이런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1924년 1월 6일 전남 하의도에서 태어난 그는 자유당 독재를 지켜보며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3전4기 끝에 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사흘만에 일어난 5.16 쿠데타로 등원도 해보지 못한다. 63년 제6대 총선 때 목포에서 당선 되면서 급성장한 그는 야당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 후보와 맞붙던 71년 교차승인론, 남북한 교류추진 등 획기적인 남북정책을 내세우며 「3단계 통일론」의 기초를 다졌다.
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으로 반유신독재의 상징적 인물로 국제사회에 투영된 그는 민주회복국민회의 (74년), 3.1구국선언(76년)을 이끌었다. 79년 10.26으로 「서울의 봄」이 왔으나 신군부의 쿠데타로 「내란음모사건」주동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국제사회의 구명운동으로 감형된 후 82년 10월 미국으로 건너갔고 85년 2월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5공정권을 몰아 붙여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다. 88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재기했으나 9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2년을 보내고 95년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왔다.
97년 대선에서 헌정사상 첫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룬 그는 3단계 통일론에 따른 「햇볕정책」으로 대북식량지원과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켜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통일의 길을 열며 평양 방문과 이산가족 상봉으로 「지구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냉전의 벽」을 허물었다.
신앙인 김대중
『나는 국민들을 위해 아직 못다한 일이 많다며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73년 도쿄에서 납치당해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위기 가운데서 김대통령은 두손을 모았다고 밝힌 바 있다. 테러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언제나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습과 함께 투영됐다. 신앙인으로서 그의 길은 장면 박사를 만남으로써 비롯된다. 1957년 장박사의 권유로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토마스 모어 성인의 삶처럼 그는 실제 영세를 받은 이후 더 험난한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성인의 삶이 그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됐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토마스 모어 성인은 400년만에 복권이 됐는데, 나는 50년이나 100년이면 한국역사에서 올바르게 평가받게 될 것』이라며 고통을 견뎌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최후진술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 정치 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앞서 71년 대선 때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한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는 반공이 국시인 상황에서 진보와 좌파로 매도됐고, 그에게는「빨갱이」라는 분칠이 가해졌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냉전구조 하에서 이보다 더 지켜내기 힘들었던 (남북)화해와 평화론, 이런 그의 역정은 신앙인으로서 굳건한 신앙의 힘과 사랑의 정신이 없고선 감내하기 힘들었을 십자가였던 셈이다. 30년이 지난 오늘 「3단계 통일론」이 1000만 이산가족의 한을 풀고 온겨레의 생존을 보장하는 남북화해의 단초를 열었 다는 점은 평화와 화해를 지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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