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은수자」또는 「사막의 선교사」라 불리는 샤를르 드 푸꼬는 사하라에서 나자렛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따르 고자 하였다. 「은수자」와 「선교사」는 동시에 양립하기 어려운 성소 및 생활상태로 여겨지지만 푸꼬의 특수한 삶의 경우엔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사막의 오지(奧地)에서 은거하였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도적 봉사와 증거의 삶을 살았고,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철저한 관상적 기도를 동반하였다. 그는 종교와 문화가 다른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같은 노동자로 있으면서 「만민의 형제」로 사는 것이 그의 성소이며 사도직이라 확신했다.
생애
샤를르 드 푸꼬는 1858년 9월 18일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성실히 수행하던 한 귀족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불행히도 여섯 살 때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한 친척 으로부터 보호받던 그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기숙사에 보내져 공부하며 청소년기를 지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학업에 성실치 않아 성적이 부진했고 엄격한 규율 준수를 요구하는 기숙사 생활을 싫어해 어느 날 그곳에서 도주했다. 그는 퇴학과 동시에 신심생활도 멀리했고 결국 신앙을 잃었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장교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방종한 활을 하다가 결국 나쁜 행실이 드러나 1881년 휴직처분을 받게 되었다. 1883년 동료 들이 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푸꼬는 군에 재 입대하여 그들과 합류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지리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아프리카에 남아 탐험대의 일원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 탐험에서 흥미 있는 것들을 많이 발견했는데, 특히 학문적으로 유익한 지도 작성법, 측량법 등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그에 대해 상세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했고 나중엔 이 분야에 대해서 유력한 잡지를 발간함으로써 유명해졌다.
파리의 지질학 연구원에서는 푸꼬의 공훈을 치하하는 황금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학문 연구에 열중하면서 더 이상 옛날의 경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탐험 중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며 살아가는 회교도들이 있음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사막의 광활하고 신비로운 장관에서 그는 무엇인가 숭배하고 싶은 내적 충동을 강렬히 느꼈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가 기숙사를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삶을 변혁시킬만한 심경변화를 겪게 되었다. 파리에 돌아 온 그는 내적 움직임에 이끌려 자주 성당에 갔으며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간절한 기도를 반복해서 바쳤다. 『하느님, 만일 당신이 계시다면 저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어느 날 사촌누이로부터 소개받은 위블랭 신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신부는 일생동안 영적 대화를 통해 큰 도움을 주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토론할 마음으로 그 신부를 찾아갔던 푸꼬는 그것을 용납 하지 않고 위압적으로 내린 그의 명령에 따라 고해성사를 보았고 성체를 모셨다. 이 때가 12년간 신앙을 떠나 방황하다가 돌아온 1886년,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다.
일생을 바쳐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푸꼬는 위블랭 신부의 권유에 따라 우선 성지 순례를 하게 되었는데 나자렛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예수님이 알려지지 않은 마을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목수로서 숨어 사셨다는 것이 그의 뇌리에 깊이 새겨 졌고 거기서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 강한 원의와 함께 성소의 싹이 트게되었다.
성지 순례에서 돌아 온 푸꼬는 1890년 1월 16일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처음엔 그곳에서 평화를 누렸으나 점차로 그의 내면에서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는 나자렛의 생활에 대한 열망을 느끼며 수년간 내적 갈등을 겪은 후 결국 장상의 허락으로 그 곳을 떠나 나자렛으로 갔다.
그는 작은 판자집에 기거하면서 글라라 수녀원의 잡역부로 3년간 정원을 돌보고 잔심부름을 하였고 그 외의 시간엔 성체 앞에서 기도와 복음묵상에 열중했다. 푸꼬는 그곳의 원장 수녀와 위블랭 신부의 권유에 동의하여 오랜 동안 망설여 오던 사제의 길로 나아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전에 살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1901년 6월 9일 43세의 푸꼬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모로코 근처에 있는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 베니아베스로 떠났다. 그는 처음엔 그곳에서 봉쇄생활을 하며 나자렛의 삶 그대로를 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군인들과 가난한 모슬렘 토착민들의 영적 요구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는 봉쇄생활의 계획을 바꾸어 '만민의 형제' 가 되는 길이 주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바람에 응답하고자 하는 열의, 예수님께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열정은 푸꼬로 하여금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했다.
푸꼬는 이슬람교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가운데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모시고 가는 일』이라고 확신하며 이 성체의 현존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는 수도 가족을 창립하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는 또한 성심의 작은 자매회 창립도 구상했다.
1903년 1월부터 그는 아직 어느 사제도 간 적 없는 사하라 사막의 중심 산악지대 호가르의 뚜아래그 지방의 복음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1904년 여러 달 동안 호가르 지역을 순회하였고 테마세크어를 공부하여 그 언어로 복음서를 번역했다.
1905년 8월 13일 타만라셋에 도착한 푸꼬는 1916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곳의 원주민들을 위해 활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벗이 되었다. 그의 소명은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있기 위해서 그는 오랜 동안 미사도, 성체도 없이 지내야 했다.
그는 2년 동안 타만라셋에 체재한 후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조금씩 나를 신뢰해 주었습니다』. 그는 투아래그 사람들이 『저 사람은 우리말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할만큼 그들의 말을 배웠으며 투아래그 용어 사전 만드는 일에 또한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그는 함께 일할 동료들을 얻기 위하여 여러 곳에 편지를 썼고 친구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해를 기다려야 했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작은 형제회와 작은 자매회가 창립되기까지는 많은 기도와 희생을 바치면서 성화되고 목숨마저 바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불모의 땅이 신앙의 풍요로운 땅이 되기 위해선 날마다 새로운 예수님의 피, 자신의 피가 요청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1897년 6월 6일 나자렛에서 이렇게 썼다. 『너(푸꼬 자신)는 순교자로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알몸이 되어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리고 그것이 오늘이기를 소망하라』.
1916년 12월 1일 오후 7시 경 그는 세누시스트 일당에 의해 은둔소 밖으로 끌려나와 결박을 당하고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침묵 지키며 기도하고 있던 푸꼬를 15세 소년에게 총을 주며 감시하도록 하고 은둔소를 약탈하러 갔다. 그 사이에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두 명의 낙타병이 경보를 울리며 달려 왔는데 그 소리에 놀랜 소년은 푸꼬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날 아침 쓴 한 편지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들의 무화(無化), 자기 부정은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키는 영혼에 선을 행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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