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인이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어려선 이웃한 큰 도시에서 공부하느라 고향을 떠났고, 그다음 대학공부는 서울에서 그리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외국에도 몇번씩 몇년을 살다 오기도 했고 아무튼 고향은 그녀에게 언제라도 때가 되면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만하게 밀려난 곳이었다.
포장된 큰 길에서 쑤욱 들어간 고향마을. 그녀는 달구지를 타고 다녔던 길을 승용차로 천천히 지나가면서 차의 유리문을 모두 아래로 내렸다.
이 개울 어디쯤에서 올챙이를 잡았던 기억, 덧니처럼 뾰족한 돌에 걸려 넘어져 피가 났던 기억, 그녀는 무릎을 만져보며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해가고 있는데 이곳은 아직도 웅덩이 속 같구나라며 옛 기억을 되살려본다. 그녀는 정겨운 눈길을 고향마을에 쏟으며 큰 느티나무 옆 공터에 차를 세웠다. 먼 친척이 살고있는 그녀의 옛집. 조금 멀찍이서 집을 바라본다.
단감나무가 세그루 있었지, 집 뒤 대나무 숲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름에도 선뜻한 우물엔 지금도 수박덩이를 담궈 놓고 먹을까? 그녀는 한껏 추억에 젖어 집 주위를 둘러본다. 어머나 이럴 수가! 그녀가 썼던 글. 「아버지」 「어머니」 「철수야」 「영희야」 그녀가 썼던 낙서가 희미하게 남았는 흙벽을 본 것이다. 그녀는 황토벽을 손으로 쓸어본다. 그래, 내 글씨야. 옆에 바를 正자는 오빠 글씨고.
몇해전 병으로 돌아가신,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오빠를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다. 이건 낙서가 아니다.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 겪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도장시킨 흔적이야. 그녀의 물기어린 눈에 자운영꽃이 흔들렸다. 엘리베이터에 네 사람이 탔다. 그들은 층을 알리는 번호판을 올려다 보거나 손에 들고 있는 물건에 눈길을 주고 있다. 아니면 자동차세 재산세를 내라는 안내문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들어 엘리베이터 속에서의 어색함이 더한것 같다. 그 낙서 때문일거다.
그 낙서를 읽게된 것은 한달 전이지 싶다. 열렸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다 날카로운 것으로 파서 쓴 낯 붉어지는 낙서,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모두 읽고도 안읽은 척하고 싶었을 욕설이다. 어제 저녁 함께 탔던 윗층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셨는데 물어보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낙서 탓이다.
누가 한짓일까. 까치발을 하고 썼다면 어린아이일 것이고 큰 키의 사람이 했다면 무릎을 구부렸을 것이다. 누가 했건 어찌 이런 심한 낙서를 하고 싶었을까. 휴게소 공중변소로 착각했을까. 자기집 방문에다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겠지.
『이건 분명히 애들이 한 짓이예요. 멀쩡한 어른이 할 짓은 아니지요』
청소하는 아줌마가 구시렁거리며 지워보려고 애쓰는 것으로는 어려웠다. 정말 그럴까. 어린아이의 짓이라고 믿는 아줌마 생각에 나는 동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낙서도 아는 것 만큼의 범위에서 가능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외출에서 돌아오면서 보니까 에나멜 스프레이로 부끄러운 낙서는 대충 얼버무려 있었다.
한달 동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기 민망했던 그 글, 누군가의 숨어쓴 낙서는 부끄럽고 치사한 것이라는 것도 함께 읽게해 주었다.
청소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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