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74년 역사의 유구한 전통을 지닌 가톨릭신문은 근 1백여년을 한국 천주교회와 영욕을 함께 했다. 일제시대에 평신도들에 의해 창간된 가톨릭신문은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진리 탐구의 열정으로 창설된 한국교회와 함께 역사의 흐름을 기록해왔던 것이다. 가톨릭신문은 가히 근현대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백년간은 세계와 한국, 한국교회와 민족 모두에게 유례없는 격동기였다. 한국교회는 창설에 이어 혹독한 박해를 받았으며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다. 광복 후에는 민족 상잔의 비극을 맞았고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 천주교회는 명실상부한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제삼천년기를 이끌어갈 아시아 교회의 복음화를 위한 주역으로 등장했다.
창간 74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역사를 가톨릭신문에 보도된 기사들, 특히 1면 톱기사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본다.
천주교회보의 창간
「本報는 左의 세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 1일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1927년 4월1일자로 창간된 「천주교회보」는 그후 53년 「가톨릭신보(新報)」, 54년 「가톨릭시보(時報)」그리고 다시 80년 「가톨릭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33년 「천주교회보」는 1949년 복간까지 16년간의 긴 공백기간을 갖게 된다.
광복과 교회, 분단의 비극
1949년 4월1일 다시 발간된 천주교회보는 1년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또 다시 그해 6월부터 10월까지 휴간했다.
「…이번에 당한 苦難이 우리 민족이 과거에 범한 罪과와 過誤를 淸算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天主께서 주시는 試鍊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 고난을 甘心으로 참아받고 또 이것을 사람들의 淨化와 聖化의 수단으로 알며 더욱 신앙심을 발휘하여…」(천주교회보 1950년 11월10일자, 대구대교구장 최덕홍주교 「모든 聖職者와 信者들에게) 중에서).
그해 11월 복간된 천주교회보에는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위로하는 한편 고통을 희생으로 알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글들이 실렸다. 희생된 성직자들의 명단과 함께 멸공, 반공을 외치는 글들도 게재됐다.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글들이 연일 실리기 시작했다. 11월 복간호의 「이 전쟁은 반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전쟁이다」라는 제목의 톱기사를 시작으로 북한 교회와 중국교회의 소식을 전하면서 이들 교회의 수난과 공산주의에 대한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외신에서는 헝가리, 폴란드, 독일 등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외국교회로부터 답지한 성금과 구호품 등에 대한 소식이 실리기도 했다.
바티칸공의회와 쇄신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막했다.
「…이번 공의회가 본질적으로 불변의 교리와 다른 어떤 신기한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대에 맞추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어 가면서 시대가 주는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신앙생활을 완전히 하도록 하는 길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 뿐이다」(가톨릭시보 1963년 9월15일자 사설 「공의회를 정확히 인식하라) 中에서).
그후에도 가톨릭시보는 가장 정확하고 풍성하게 공의회의 진행을 중계했으며 공의회가 모두 마친 후에도 각 공의회 문헌들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해설했다. 한국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 전환기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고 쇄신과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했다. 교회의 현대화와 함께 민족과 사회 문제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 일치운동, 타종교와의 대화에도 열린 자세로 임하게 됐다. 공의회를 거치면서 일기 시작한 일치의 기운은 성서 공동번역으로 구체화됐고 이러한 열린 자세는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투쟁과 인권 옹호, 사회 개발을 위한 연대의 바탕이 됐다. 1966년 주교회의가 정식으로 조직되면서 한국교회의 제도적 발전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 1968년 3월8일에는 한국 최초로 본사 사장을 역임했던 서울대교구장 김수환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가톨릭시보 1969년 4월6일자는 추기경 탄생에 환호하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사회 정의 실현과 광주
한국교회는 공의회와 급격한 산업화, 독재의 압박 속에서 사회 정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사회 참여가 곧 시대적 요청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문 기사에서도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방향을 향한 교회의 움직임이 잘 전해져왔다.
1971년 11월14일 제4회 평신도의 날을 맞아 한국 주교단은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같은 날 가톨릭시보는 성명서 전문을 1면 전체에 게재했다.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이 병행하지 않는 곳에서는 불안과 혼란이 따른다. …교회는 세속과 타협할 수 없고 부정부패와 타협할 수 없다. 자신의 부정부패의 요소를 말끔히 청산하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데에 앞장서야 하겠다」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위한 교회의 움직임들은 소상하게 가톨릭시보에 보도됐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 사회상황 아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소명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80년대는 광주의 비극, 그리고 이에 대한 침묵으로 시작됐다. 가톨릭신문 80년 6월1일자에는 광주 민중 항쟁과 관련해 5월23일 긴급 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형제적 和解 기반 마련해야」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지난 5월23일 광주사태와 관련, CCK 회의실에서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가톨릭신문 1980년 6월1일자).
하지만 광주사태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
1981년 10월18일,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거행된 신앙대회에 이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뤄진 일련의 사업들은 한국 교회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은 한국 가톨릭의 존재를 널리 알림으로써 전교에도 크게 기여했다.
대규모 종교 집회를 통해 한국 교회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됐고 이는 80년대 신자 증가율이 연평균 7.54%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교세증가에는 가톨릭교회의 민주화와 인간 존엄성 수호를 위한 투신에 크게 기여했다.
시대의 고난 민족과 함께
한국교회는 80년 광주의 비극을 겪으면서 정권의 폭압에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나름대로 항쟁에 대한 참여와 지원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1982년 3월8일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이후 최기식신부 등의 연행, 전주교구 문정현신부의 납치 등 첨예한 갈등을 불러온 사건들이 발생했다. 1985년 김수환추기경의 성탄 담화에 이어 정의평화위원회, 한국평협의 성명 발표, 각 교구 사제단과 수도회의 개헌 서명운동 등을 거치면서 86년 중반 이후 교회와 정부는 대단히 첨예한 긴장 관계에 놓여있었으며 곳곳에서 부딪혔다.
87년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 그리고 「4·3 호헌 조치」에 이은 각 교구 사제단의 항의 농성, 각계의 개헌 서명운동 등이 펼쳐졌고 마침내 5월18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이를 기화로 범국민적 저항이 불붙었다. 결국 6월29일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항복 선언을 했다.
질적 성장의 모색
1992년 한국교회의 전체 신자수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90년대 들면서 신자 증가율은 눈에 띄게 감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는 70년대부터 이어진 80년대 한국 교회의 대사회적인 역할과 대규모 집회, 교황 방문 등이 전교에 미친 파급 효과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교회는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됐고 양적 팽창에 걸맞는 질적 도약에 사목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이같은 인식은 각 교구장 사목교서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90년대초는 이러한 위기 의식과 문제점의 인식을 바탕으로 질적 성장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와 함께 민족화해를 위한 노력이 더욱 박차를 가했고 생명운동과 환경운동의 영역도 더욱 확대됐다. 가톨릭신문의 보도 역시 이러한 다채로운 사회사목 영역으로 확대됐다.
IMF의 터널을 지나서
97년말 한국은 IMF 경제 위기에 빠져들고 누구 할 것 없이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왔다. 교회는 가차 없는 구조조정과 해고의 칼바람 속에서 신음하는 국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쉼터 개설, 봉급나누기, 무료급식, 구직알선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왔으며 가톨릭신문 역시 이러한 시대적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우리들의 자세와 움직임들에 관심을 갖고 취재 보도했다. 어느 정도 위기상황을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또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한층 더 적극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새로운 천년기를 열며
2천년 대희년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 모두에게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었다. 세계 교회와 한국교회는 대희년 개막 전 수년간에 걸친 영적, 신앙적 준비를 다지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충실한 준비 상황들이 가톨릭신문을 통해 전해졌다.
가톨릭신문은 새로운 세기,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사명감으로 대희년과 관련된 각종 소식과 기획기사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새로운 복음화를 준비하도록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대희년을 마감하고 2001년 본격적인 새 세기가 시작됐다. 이미 대희년을 준비하기 위한 주교대의원회의 아시아 특별총회가 열려 새 천년 아시아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특별한 소명이 강조됐다.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이제 제삼천년기 세계교회의 중심이 될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주역으로 자리잡아야 할 역사적인, 구세사적인 소명을 안고 있다. 가톨릭신문은 이러한 지향을 갖고 앞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시대와 역사의 요청을 깨닫고 섭리를 일깨우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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