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세 번에 걸쳐 당신이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해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 예고를 전하면서 제자들이 수난하실 것이라는 이런 스승 예수님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수난 예고 바로 다음에 전해주며, 곧 이어서 그러한 제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고쳐주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 지난 주일에는 첫번째 예고의 말씀을 들었고, 이번 주일에는 두번째 예고의 말씀을 듣는다. 둘째 예고가 들어있는 오늘 복음말씀이 첫째 예고와 셋째 예고가 들어있는 대목들과 다른 점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말씀으로만 일깨워 주시지 않고, 어린아이를 감싸 안으시는 상징적 행동으로써 가르치신다는 점이다.
마르코 복음서 전반부의 여러 이야기에는 『이 사람 (예수)이 도대체 누구냐?』라는 식의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 그런 일련의 질문에 대한 정답은 『선생님은 그리스도(메시야)이시다』(마르 8, 29)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주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그러한 모범답안적 고백 후에도 『예수님이 어떤 의미의 메시야이시냐?』라는 문제는 남아있다. 왜냐하면 당대의 일반 군중이 기대하였던 메시아의 모습은 주로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강력한 정치군사적 지도자로서 이민족의 지배에서 불쌍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는 분이셨는데, 예수님의 실제 삶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 독자들은, 초기에 예수님의 권능에 찬 말씀과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드디어 메시아가 왔다고 생각하며 환호하던 군중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의 말씀을 듣거나 수난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받았을 충격을 충분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충격을 복음사가들은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 잘 보여준다. 예컨대, 지난 주일의 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분명히 스승 예수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베드로의 그런 행위는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 행하시는 구원행위를 막는 「사탄의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호된 질책의 말씀을 들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8).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두번째 예고가 나오는 오늘 복음 말씀에는 수난하시게 될 예수님을 전혀 이해 못한 제자들의 태도로서 「제자들의 자리다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스승 예수님은 장차 많은 고난을 당하실 것이 라는데,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런데 문제는 구체적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태도가 깊이 남아 있다는데 있다. 우리도 머리와 입으로는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그분께서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셨다』라고 고백을 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떠한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입으로는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지만, 수난하시리라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첫째 자리」나 찾았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도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문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생존을 위해- 「경쟁」속에 미친 듯이 살아가야 하는 일반 세상 살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공동체 곧 교회 안에서마저 「높은 자리」, 「영향력 있는 자리」를 둘러싼 불미스러운 일들이 없지 않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사실은 우리 신앙인들이 얼마나 자주 「복음의 말씀」을 명심해야 하는지를 더욱 일깨워 준다. 오늘 복음과 같은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말씀이다. 「자리 다툼」을 하였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침을 주신다. 먼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그리고 곧 이어 그 말씀을 실행으로 보여주시며 가르치신다: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행동에서 어린이는 「순진무구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어린이를 감싸 안으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제자들이 『약하고,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봉사해야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 삶이 바로 사랑 때문에 십자가까지 지고 가시는 스승 예수님을 참으로 뒤따르는 제자의 삶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러한 「사랑과 섬김」의 제자의 길이 바로 「참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이다. 그 행복은 먼 훗날 죽은 다음에나 비로소 얻게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이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이런 참 행복을 증거해 주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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