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무더위와 함께 찾아왔던 여름 휴가철도 끝나고, 이제 직장인들은 직장에, 학생들은 학교에 돌아오고 있다.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수선했던 우리의 마음도 제자리를 찾아 와야 할 때다. 오늘 복음 말씀은 주일복음으로 지난 4주간동안 연속으로 봉독되었던 요한 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앞에 길게 나왔던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담화에 대한 부정적 및 긍정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대목의 목표는 긍정적 반응인 다음의 베드로의 고백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데 있다: 『주님, 주님께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먼저 부정적인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길게 나와 있다. 초창기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여러 기적과 그분의 권위있는 말씀에 열광하며 구름같이 밀려오던 군중들이, 한 때는 그를 데려다가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하던 그 군중(참조: 요한 6, 15)이 시간이 가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동에 실망하고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 예수를 적대시하던 사람들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따르던 (넓은 의미의)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못마땅해하며 떠나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묻는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다행히 시몬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의 대답」을 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라는 질문을 보면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열두 제자를 당신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떻게 보면 섭섭하게도, 예수님은 당신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붙잡아 두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에게 있어서 당신 활동의 성패는 많은 군중으로부터 환호를 받는데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최우선적인 것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질문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군중심리에 끌려 당신을 따르거나,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인형이나 기계처럼 당신의 뜻을 따르기를 원치는 않으셨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마르 8, 29)라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은 각자 당신을 올바로 알아보고 「고백하며」살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가? 우리도 혹시 예수님 당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빵」「썩어 없어질 빵」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썩어 없어질 빵」만을 찾는 식의 신앙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 「보이는 빵」은 곧 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빵」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징」일 뿐이다. 「보는 빵」을 계기로 「생명의 빵」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신」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아무리 교회의 친교생활이 즐겁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열성껏 활동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교회생활은 모래성이나 다름없다. 작은 파도에도 힘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작은 위기에도 견뎌내지 못한다.
요즈음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거 어느 때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종류의「가치제공자들」로부터 유혹을 받고있다. 여기 저기서 「나를 믿으라」고 화려한 몸짓 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나를 따르면 부귀영화를 얻게 되고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손짓에 따라가며 교회를 등지고 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도 흔들리게 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이런 여러 유혹의 손짓을 받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강력히 유혹하는 것 들이 이토록 많더라도, 그리고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처럼, 주위의 사람들이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 둘 떠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는, 오늘 화답송 시편의 후렴 (33[34], 9)처럼, 평소에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연습을 해야한다. 연습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오랜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연습이 잘 되면, 믿음은 매번 의지적으로 노력해야만 유지되는 믿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믿음」이 된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에 대한 체험이 몸에 배여 있기 때문에 그 삶에서 자연스럽게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우러나온다.
그리고 이런 연습을 하는데 있어서는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신앙공동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앙공동체는 바로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 공간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각자 진실된 신앙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들이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오늘 복음의 사도 베드로처럼 『주님, 주님께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라고 힘차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동안의 미온적인 신앙태도를 반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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