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의미의 안락사는 말기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고 품위있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 「호스피스」기능을 갖는 것… 인공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다”
안락사인가 안락살해인가?
지난 11월, 미국 CBS방송은 '안락사'라는 미명으로 한생명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방영했다. 그 순간을 2천4백만명의 미국내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지켜보았고 녹화테잎과 비디오, 자료화면을 통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수억의 시청자들에게 순식간에 경쟁적으로 비춰졌다.
안락사를 주도하고 비디오를 촬영한 잭 케보키언이라는 이 의사는 60분간에 걸쳐 환자의 동의를 얻어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전장면을 비디오 테잎에 담았으며 이를 여과없이 방영한 것이다.
비디오의 주요 내용은 토머스 유크(52세)라는 루게릭병 말기환자가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안락사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서명하자 케보키언 박사가 그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근육완화제를 투여, 폐기능을 정지시키고 마침내 극약으로 심장을 멎게 하는 내용이었다.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 이 살해 장면이 방영되자 곧바로 뜨거운 윤리논쟁이 촉발됐다. 분명 안락사가 아니라 안락사라는 미명으로 살해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원래 안락사라는 개념은 "임종자에게 사랑에 가득찬 도움과 자신을 돌보는 사랑을 체험하도록 하는 자애롭고도 효과있는 보조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가능한 한 아름다운 죽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안락사의 진정한 의미는 말기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고 품위있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의 기능을 갖는 것이지 인공적으로 한사람의 생명을 직접적이고 의식적으로 단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 의사 6%가 안락사 처방
문제는 안락사문제가 그 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이긴 하지만 지난 4월, 1900명의 전문의를 상대로 실시한 조사결과 의사 5명 중 한명꼴로 말기환자들로부터 안락사를 요청받고 있으며 이중 6%가 환자의 요청을 들어준 것으로 조사돼 충격을 준 바 있다.
의학전문지에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의사 중 18.3%가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로부터 안락사를 요청받은 일이 있다고 답했으며 6%는 실제로 환자가 자살할 수 있도록 약을 처방하거나 직접 환자에게 죽음의 주사를 실시한 것으로 응답했다.
이같은 안락사문제는 그 도를 넘어 의사와 간호사 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 남서부의 한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의 경우 지난 3년동안 30여명의 말기환자를 안락사 시킨 것으로 조사된 바 있으며 미국 LA근교 글랜데일이라는 병원에 근무하는 한 간호사도 92년부터 97년까지 50여명의 말기환자를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안락사문제는 알게 모르게 점차 확산돼 가고 있는 추세이며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를 돕거나 자행하는 빈도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심지어 네덜란드 국민들 중에는 안락사의 위험성에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생명선언증'을 지참할 정도. 혹시 불의의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갔을 때 의사가 의식없는 환자의 동의없이 안락사 시킬 것을 우려해 이런 '생명선언증'을 지참하고 있다고 한다.
안락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인간생명의 가치에 대해 교회는 "어느 누구도, 그 무엇 보다도, 무고한 인간존재로서 태아이든, 유아이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확고히 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 14,8)"라고 사도 바오로가 말한대로 무구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예외없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리고 근본원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극도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이같은 안락사 문제에 대해 1980년 5월5일 이미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을 발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동참할 수 없다. 어떤 권위라도 그러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해하는 문제이고 인간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라고 까지 천명했다.
적극적인 의미로 교회는 극도의 고통속에 있는 말기환자나 임종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그 고통의 순간을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하는 기회로 삼아 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에의 동참이며,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치는 구원 희생과 일치"한다고 배워 왔다.
왜 안락사인가
아울러 안락사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특수한 행위에 의해 환자의 생명을 끝내게 하는 것이라는데 있다. 단순히 편안한 죽음을 마련한다고 하면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흥분제나 마취제를 사용하여 환자의 의식을 빼앗아 개인의 죽음을, 즉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 최후의 결정내지 결단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환자의 죽음을 목적으로 '고통스러운 혹은 무가치한 삶을 단축시키려는 뜻으로 한 인간의 죽음을 재촉'할 경우, 이것은 곧바로 직접적인 살인이라 할 수 있다.
남을 동정하는 마음과 동정하는 방법은 엄연히 구별된다. 남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나 타인의 생명을 혹은 자기의 생명을 무가치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속단해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특히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것은 고통스러운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기에 희망을 포기한 태도이지, 살고 싶은 의욕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또다른 이유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생명이라 할지라도 인간생명으로 존엄성을 인정할 때 인간사회는 건전하고 인명에 대한 존엄성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서는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우리의 지상 존재를 종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불멸의 생명에로 새로운 문을 여는 시점임을 직시한다면 쉽게 안락사라는 방법은 선택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 관계자들은 "한 생명이 끝날 즈음, 임종자들은 이 위대한 사건에 대한 채비를 신앙의 빛 안에서 스스로 갖추는 자세가 필요하고 의료인들과 가족들은 안락사를 권유하고 동조하기 보다는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에게 끝없는 친절과 정성어린 사랑의 위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 안락사의 역사와 정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안락사에 대한 태도 명시
「절대 죽지 않을 것」이란 확신 가질때와 「만일 죽어도 그만」이란 입장의 의료행위엔 정당한 치료행위와 비난 받는 행위로 구분
안락사에 대한 태도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문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 선서문에서 「나는 죽음을 유도하는 독물은 누구에게나 주지 않을 것이며 가령 본인이 희망한다 할지라도 주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러한 배척해야만 하는 행위에는 결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숭고한 정신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더 심화되었고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락사에 대한 우울하고도 비참한 배경도 없지 않다. 생활능력이 없는 기형아나 저능아 등을 도태시키기 위해서 고대에서 사용돼 왔으며 원시민족을은 한정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또 전시에 이동 등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환자와 노약자들을 무자비하게 안락사시키는 좋지 않음 풍습이 있었다.
원래 안락사라는 용어는 심한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뜻했으나 요즘에는 그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안락살해의 의미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 안락사란 무엇인가. 이상적 안락사란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고통없이 편안하게 이 세상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구언 손길이다. 육체상의 통증을 경감시키고 가능한 한 통증이 없도록 해주는 것은 의사의 치료학상 가장 숭고한 임무라 할 수 있다. 극심한 통증으로 신음하는 환자에게 통증완화를 위해 마취약을 투여하는 것은 윤리상 위법이 아니고 의사의 의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의사의 치료행위 중 용인되는 것과 용인되지 않는 경계가 아주 협소하고 위험하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치료행위와 안락사 사이에 칼로 자르는 듯한 명확한 경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만약 의사가 처방을 할 때 이 청방으로 말미암아 환자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처리하는 경우는 의사의 정당한 치료행위요 신성한 의무라 할 수 있으나 「만일 죽어도 그만이다」라는 입장에서 처방했다면 이 의사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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