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유다인들이 모세의 율법인 토라를 지키며 야훼 하느님께 대한 유일신 신앙과 그들의 고유한 관습을 어디서나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그들이 살고 있는 현지의 종교와 관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고수한 이러한 정체성이 여러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버티어 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오늘을 유지하게 한 바탕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정체성이 유다인처럼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뿌리를 두면서도 그리스도-메시아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다인의 정체성
교회 역사 초기에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야훼 하느님을 모독한 불경스러운 종교라 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그들은 로마 당국에 충성심을 증거라도 하기 위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교도들의 억압을 교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시의 방화범으로 몰아 일으킨 네로 황제 박해때에도 네로 황제의 부인이며 유다교에 아주 호의적이었던 뽑뻬아(Poppea)등, 네로 황제와 가깝게 지냈던 유다인들이 박해를 교사, 선동한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은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시작되어 악순환이 계속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국교로 선언되어 그리스도인들이 고위직에 올랐을 때에도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유다인들은 전혀 동화되지 않는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
상황이 역전되어 이제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다교를 신성 모독적이고 불경스러운 교리의 종교로 취급하였다. 벌써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 유다인들을 억압하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테오도시오 황제 시대에 깔리니치움(Callinicium)에서 유다인들과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이 일부 수도자들의 난폭한 대응을 야기해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 회당과 영지주의 경당을 방화하였다. 테오도시오법전에 의하면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인을 하인으로 부릴 수 없도록 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교로 개종하면 죄인으로 취급되어 그들의 재산이 국고에 귀속되었다.
또한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인 직책에서 제외되었으며 유다인들의 그리스도인 여자와의 결혼이 금지되고, 결혼하면 간통으로 간주되었다.
유스티니아노 황제는 유다인들의 법적인 신분을 규제하고 555년 유다인들의 도움으로 일어난 사마리아인들의 반항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역자들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하면서 냉혹하게 대응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다인들과 합세하여 팔레스티나 총독과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고 성당을 불경스럽게 모독하며 방화하였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1세기까지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간의 충돌은 제한적이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덤」을 되찾으려는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유다인배척주의가 폭발하여 『무죄한 구세주를 십자가에 처형한 자들』의 후손들인 유다인들을 학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여겨 이 전쟁에서 라인 계곡, 헝가리,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많은 유다인들이 살해되었다.
제2차 십자군 원정도 마찬가지로 무질서한 혼란을 되풀이하였는데, 프랑스 북부와 독일에서도 많은 유다인들이 학살되었다. 이에 대해 베르나르도 성인은 『누구든지 히브리인들을 죽이기 위해 손을 댄 사람은 예수님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과 똑같은 중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선언하며 유다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그들을 억압하는 법규를 더욱 엄격하게 하였는데 특히 제4차 라테란공의회(1215년)는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는 옷을 입도록 규제하였고 「주님의 수난」과 관계된 축일에는 유다인들이 외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유다인들은 그런 축일에 오히려 축제 때 입는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나와 「주님의 수난」기념일을 비웃으려는 의도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외교인 박해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자유보다는 시민으로서의 자유가 더 타격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이 엄격하게 감시당했고 이단심문을 통해 그들의 기만적인 개종을 기소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는 죽음과 개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많은 유다인들이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주교가 되었으나, 그들의 직무수행의 일부도 친 유다교-반 그리스도교적인 기만적 행태를 보인 것으로 간주되어 유다인들에 대한 저항감이 증폭되었다.
이렇게 그들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유다민족들은 노예로 영원히 단죄된 민족으로서 취급되어 법률 앞에서 거의 아무런 권리도 누릴 수 없었다.
또 유럽 남부의 도시에서는 격리된 구역에서만 생활하도록 하여 폐쇄된 게토(Ghetto) 사회를 이룰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역시 이 시대에도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교인을 하인으로 거느릴 수 없었으며, 법정에서 그리스도교인을 거슬러 증언을 할 수 없었고 일체의 공직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인노첸시오 4세 교황(1243~1254년)같은 이는 유다교의 율법과 전승을 집대성한 탈무드를 소각하도록 명령하였다. 아무리 종교적인 갈등에서 비롯된 이유도 있다 할지라도 유다인을 배척하는 규정이 많은 경우에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교와는 무관한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세기부터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경작지가 확장되며 상업이 발달하면서 교역이 다변화되었다. 그래서 이윤을 추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추구되고 경제적 수단이 다양해져 금융업이 활기를 띠면서 이자놀이가 성행하고 생산의 독과점이나 전매 행위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는 바울로 사도의 권고(2데살 3,11)에 따라 중세 유럽 사회에서 일정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리대금을 교회법으로 금지하였지만 유다인들이 특별히 금융업과 상업에 전념하여 고리대금 등 부를 축적하는 무자비한 수단 때문에 유다인들에 대한 본토인들의 증오심과 혐오감이 쌓여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세와 같은 폐쇄된 사회의 본토인들의 눈에 유다인 자신들의 배타주의와 본토인들과는 이질감을 가지게 하는 그들 고유의 관습에 밀착되어 있는 생활 방식 때문에 유다인들이 본토인들에게 위협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유다인의 상업적 성공
이런 악화된 상황에서도 많은 주교들이 개입하여 교회 당국이 민중의 분노로부터 유다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였다.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많은 교황들은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였으나, 그 어떤 군주도 이런 항의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교황들로부터 제시된 완화 조치는 프랑스 아비뇽과 브내쌩(Venaissin)에 속한 인근 지역에서처럼 교황령이 유다인을 위한 피난처가 되도록 한 것이다. 유다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정당한 재판절차에 의하지 않고 그들을 사형시키지 않도록 교황 교서가 여러 번 선포되었지만, 이 모든 노력들도 보복적인 유다인 배척주의를 저지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또 유다인들이 의식적인 살해나 성체를모독한 것으로 모함하는 부당한 고발들이 빈번해지자 주교들이 어떤 때는 시당국과도 불화하면서까지 흥분한 신자들을 완화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들을 취하도록 개입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와 교황령 내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은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 살고 있는 유다인들보다 더 안전하게 생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여러 나라들이 히브리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영국은 1290년, 프랑스는 1306년, 스페인은 1492년에 시행하였다. 많은 곳에서 그들은 강제로 쫓겨나고 때로는 전지역에서 추방되었지만 그들은 오래지 않아 되돌아오곤 하였다.
1347~1349년 유럽에 흑사병이 만연했을 때 유다인들이 유행병을 퍼트리기 위해 우물과 저수조에 독약을 넣은 것으로 고발되어 유다인 공동체에 대한 보복이 감행되었는데, 글레멘스 6세 교황(1342~1352)은 이러한 고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지만 민중의 폭력적인 혼란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사실 유다인들에 관한 교황청의 제재조치는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교로 거짓개종하여 야기할 또 다른 사회 혼란을 경계하고 억제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통제는 유다인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단자들과 재범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그러한 통제 조치는 이교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외국인 공포증이 가미되어 빠르게 확산된 유다인 배척주의적인 증오심을 해소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 유다인 배척주의는 현대에 와서도 그림이나 문학 작품을 통해 유다인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예를 들면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Shylock)이 유다인 고리대금업자로 등장하여 유다인을 좋지 않은 사람으로 표현한 것은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라도 유다인에 대한 서구 문화의 부정적인 흐름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
19세기말에 독일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드러났고 20세기에도 독일의 히틀러 나치 시대에 600여만 명의 유다인들이 무고하게 처형되었다.
▲ 대학살의 현장 수많은 유다인들이 죽어나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용소의 입구와 천류를 흘려보내 탈출을 막았던 담장이 2차대전 당시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로마 제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고하게 죽은 수많은 유다인들에게 저질러진 죄악이 권력자들의 정치적인 동기, 민중들의 광신적인 신앙과 탐욕, 교회 당국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탓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시대에 일어난 범죄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겸허하게 용서를 청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과거 유다인들의 잘못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잘못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선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를 박해하든지 간에 박해라면 무엇이나 다 교회가 배격한다. 교회는 유다인들과의 공동 유산을 상기하며 정신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이요 복음적인 사랑에서 유다인들에게 대한 온갖 미움과 박해와 데모 같은 것을 언제 누가 감행하였든지 간에 차별 없이 통탄하는 바이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