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결과에만 최우선적인 가치를 두지 않고 그 결과에 이르게 된 과정을 탐구하여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균형 있게평가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지난달 26일 브라질 선교 500주년 기념 대회에서 브라질 주교회의 의장 하이메 케멜로 대주교는 500년간 원주민들을 차별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했다.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고 정복한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선교 지역에 파견된 일부 가톨릭 선교사들의 비복음적인 행위에 대하여 겸허하게 반성하고 원주민들의 사죄를 구했다.
교회의 이름으로 파견된 자들이 저지른 불의한 역사적인 실체를 이해하고 역사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배경 이해 실체파악에 도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서 유럽의 각국은 민족주의적인 국가의 세력확장과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영토확장과 자원획득을 위해서 새로운 통상로(通商路)를 개척하는데 몰두하였다.
15세기말 경제적인 조건은 지중해 국가들이 동방과 교역하는데 필요했던 금을 찾아 나서도록 하였고 서방 세계로 하여금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양념 등 농작물을 경작하여 값싸게 소출을 얻도록 해외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고대에 가르친 바 있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문주의자들은 재발견하였고 항해술의 발달은 망망대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장기간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본에서 인도의 고아까지의 왕복 여행이 18개월부터 2년까지 소요되었으며 스페인 세빌리아에서 필리핀 마닐라까지 왕복 여행이 가끔 5년까지 걸리기도 하였는데, 가끔 원정대의 절반 정도까지 도중에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선교사가 여러 가지 불의의 사고로 감소되어 선교지가 공석이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유럽에서 통보 받고 그들을 대신할 사람들을 임명하여 그들이 임지에 도착하기까지에는 2년 내지는 5년까지 오랜 기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중국 의례논쟁에 대한 문제처럼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이 필요하였고 잘못 전달된 보고로 인해 야기된 시행착오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이후 영토확장 몰두
또한 아직까지도 과거 십자군 운동의 잔재가 남아 있는 정신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가게 되었고 16세 말경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 많은 신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넘어가게 되자 감소된 신자들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미래를 해외 선교에서 찾아야 하겠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일어난 배경도 새로운 선교 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스페인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사람 콜럼부스(Cristoforo Colombo, 1446?~1506)를 선두로 하여 대양(大洋) 항해를 시작하였다.
1492년 중국을 향해 서쪽으로 항해하여 여러 섬들이 모여있는 현재의 중앙 아메리카에 도착한 콜롬부스와 대원들은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이름 지은 한 섬에 상륙하였는데, 그들은 그 지역을 인도의 서쪽으로 착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곳을 서인도(西印度)로 이름짓고 그 이후에도 3회에 걸쳐 더 항해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그곳을 아시아로 확신하였다.
유럽 정복주의자들의 식민주의 정책은 정복자들의 출신 성분과 파견국가의 국력, 그리고 정복 대상 지역의 정치적인 안정과 군사력, 그리고 정복 대상 지역의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군사력과 문화적인 수준과도 관계가 있다고 본다.
아시아에 첫 발을 들여놓은 포르투갈 인들은 아시아 내륙 깊숙이 침투할 시도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내륙 깊숙이 정복하기 위한 그들의 힘이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왕조 체제와 높은 문화적 수준도 작용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정복자로서의 모습보다는 무역상인으로서의 역할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내륙의 물자들을 수송하는데 전략적으로 유리한 해안 지역을 교역 거점으로 확보하고 해상교통을 이용하여 내륙의 물자들을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이 완전한 정복자로서 식민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스페인 원정대들은 해변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아메리카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거대한 대륙에 흩어져있는 금, 은, 진주 등 값비싼 보석들을 무력으로 탈취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많은 물자들을 본국으로 수송하였다.
예를 들면 1520년부터 1660년까지의 공식적인 통계만으로도 스페인에 수송된 금이 약 200톤, 은이 약 1만8000톤이었으며, 여기에 비공식적으로 흘러 들어온 양까지 보태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초기 스페인, 포르투갈 정복자들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국가의 관리요 군인이요 상인으로서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을 남겨두고 수 만리 떨어진 이역 땅에서 외로운 생활을 해야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히 원주민 여인들과 동거생활을 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되었다. 본국의 여인들이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오기 전까지는 식민주의자들의 일부가 유럽인들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메리카 인디안(Amerindios) 여인들과 정식으로 결혼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양 대륙의 문화적 혼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토착문화를 우상숭배 취급
즉 첫 정복자들과 그 후대의 식민주의 지배자들은 유럽대륙의 교육과 관습을 점령지에 이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의 요소를 융합하여 소위 「라틴 아메리카」문화를 형성하게 하였다.
물론 문화적인 새로운 융합의 이면에는 원주민들이 당한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고통과 피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정복자들은 멕시코의 아즈테크(Aztecs)와 페루의 잉카(Inca) 문명 등 원주민들의 고대문명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마땅히 파괴되어야 할 이교적 우상숭배로 취급하였다.
북 아메리카를 정복한 앵글로색슨인들의 식민주의 정책은 훨씬 가혹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들은 인종 편견주의적인 시각에서 점령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앵글로색슨 정복자들이 식민주의 지배지를 확장하려는 정치적인 동기와 단기간에 많은 부를 축적하려는 상업적인 동기로 가족 전체가 함께 이주하였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영국 성공회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칼빈파 교도들이 이주하여 종교적인 분위기에 있어서 북아메리카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동기야 어떻든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추진된 해외 영토확장을 위한 식민주의 정책에 선교과업이 수반된 것은 교회의 선교 사명 자체로도 필수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신자인 군주로서도 당연한 과업으로 받아들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 두 나라의 해외 식민지 영토확장이 더욱 가열되어 상황이심각해지자 알렉산데르 6세 교황 (1492~1503)은 1493년 칙령으로 두 나라를 타협케 하여 그 이듬해에 또르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을 맺게 하여 점령지의 경계선을 설정하였다.
그래서 남아메리카의 서부는 스페인에게, 동부는 포르투갈에게 통치권이 인정되어 오늘날까지도 서부에서는 스페인어를 주로 사용하고, 브라질을 중심으로 동부에서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다.
교황이 칙령에서, 「군주들은 탐험대를 보냄에 있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보내어 가톨릭 신앙으로 주민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좋은 습관을 기르도록」하는 의무를 상기시키며 소위 선교 「보호권」이라는 빠드로나도 (Padronado)의 협약에 의한 선교 수도자들의 파견과 함께 해외 선교가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선교 보호권과 관련된 협약에서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그 지역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복음화의 의무를부과하였는데, 이 두 나라의 왕들은 새로운 선교 지역에서 주교 임명 등 교회관계 인사 임면권까지 가지게 되었다.
소속 왕이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이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을 감당하며 신변 보호까지 책임지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이에 못지 않은 폐단도 더 많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문명파괴의 현장 멕시코 치첸잇차 유적지 공원에 남아 있는 마야문명 흔적. 스페인인들이 무자비하게 마야문명을 파괴하고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던 과거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왕권, 교회 영향력 초월
대주교로부터 성당의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왕에 의해 임명되어 파견됨으로써 왕의 관리처럼 전락하였다. 교황은 이들의 선교 지역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없었다.
그 후의 일이지만 그들의 국력이 쇠퇴하여 그들의 임무를 실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권리를 그대로 주장함으로써 그 후에는 오히려 교회의 해외 선교에 방해가 되었다.
유럽의 원정대들이 원주민의 땅을 정복하고 선교활동을 주도한 시초에는 모두가 평신도들이었다. 이들은 본국에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아랍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실시되었던 이단심문(본지 2197~98호 참조)의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던 평신도들로서 절제되지 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복자들은 위와 같은 신앙심으로 원주민들의 신상(神像)을 쓰러뜨리고 예배장소를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이슬람이나이단자들을 정복하는 방법을 유럽 밖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1492년 콜롬부스가 보낸 편지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고 정복한 동기들이 여러 가지 요소로 혼합되었음을 알 수 있으니 즉 십자군 사상, 백만장자의 꿈, 유다인들을 대적하는 일, 금광 발굴, 값싼 농작물과 양념 수확, 노예 매매,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 등이었다.
정복자들이 그들의 점령지에 그들의 기준으로 보아 우월하다는 유럽문화를 이식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였다는 그 결과만으로,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저지른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비인간적인 잔인한 만행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분명히 하나의 죄악이지만, 소위 라틴 아메리카 문화 형성에 그들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도 있다는 것도 인정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식민주의 정책과 선교 정책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