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그리던 남한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회견을 마치자마자 서씨를 맞이한 것은 3미터가 넘는 높은 담속에서 보낸 6개월의 기산들이었다. 꿈이 꺽인 것은 물론 적잖은 상처까지 입었다.
머리엔 항상 가족들 생각뿐이었고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고 채찍질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동료들의 시선은 곱지만 않았다. 지금은 돈이 되는 일은 무조건 매달리고 있다.
회색빛 겨울하늘이 낮게 깔린 토요일 오후, 이른바 탈북자로 불리우는 서병림(40)씨를 만난 곳은 젊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울 신촌의 연세대학교 교정이었다. 물어물어 찾아왔다는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서씨는 아직 평안도 사투리가 짙다.
평안남도에 위치한 남포경공업대학교, 출신성분이 괜찮은 이들이 들어간다는 이 대학의 졸업을 앞둔 때를 회고하던 서씨의 눈은 잠시 회한으로 흐려지는 듯했다. 대학에서 채굴공학을 전공하며 지질과 탐사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서씨의 푸르기만 하던 앞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4학년 졸업반 시절. 당시 남포시당 당세포 비서이던 아버지의 체제비판적 한마디가 서씨의 인생을 갈라 놓고 말았다. 85년 3월, 일곱 일가족 모두가 평안남도 순천시의 천성탄광으로 쫓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억울함이 그로 하여금 그해 6월 첫 탈북 도정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중국으로 탈출한 그는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8개월만에 북한 체포조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이번에는 함경남도 여덕군에 있는 정치범 수용관리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4년만의 출소, 나오자마자 그의 마음을 붙들어 놓으려는 부모님의 권유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삶에 대한 애착,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를 다시 탈출의 길로 손짓했다.
93년 6월, 만 8년만에 다시 중국의 도문을 통해 북한을 탈출했다. "희망없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겪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힘듭니다". 탄광이나 정치범 수용소에서의 고통은 더욱 암담해 질 앞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서씨는 길림성 용정시 등으로 옮겨다니며 남한으로의 꿈을 키웠다. 북한 체포조의 위협 속에서도 조선족 동포들의 도움으로 남한행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길닦이, 농사일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을 찾아다니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고향을 떠나온 지 3년. 더 이상 자신의 꿈과 가족들의 삶을 시간 속에 저당잡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 지난 96년 5월8일, 남한행을 결심한 지 꼭 10년만의 일이었다.
김포공항, 서씨의 눈에 들어온 서울 하늘은 자신이 두고 온 북녘의 하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한에 닿았다는 안도가 온몸을 차지했다. 그의 머리에서는 남한에서의 생활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씨가 상상하던 꿈은 이내 무참해지고 말았다. 도착 회견을 마치자마자 영등포의 '대성공사'라는 곳이 서씨를 맞았다. 3미터가 넘는 높은 담 속에서 보낸 6개월은 서씨의 꿈을 꺾은 것은 물론 적잖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목숨이 붙어 있으면 어디서든 못살겠습니까. 큰 바람을 가졌다기보단 내 땅이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는데…"
'누가 오라고 했나' 다른 어떤 말보다 이 말이 서씨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간의 삶을 무의로 돌릴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씨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머릿속엔 가족들 생각 뿐입니다. 빨리 통일이 돼 희망을 함께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찾아 먼저 씨앗을 뿌리러 왔다는 서씨, 그는 많은 탈북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그이기에 탈북자 자신들의 의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잘 살려고 온게 아닌 이상 통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야 합니다" 남한으로 귀순한 후 적잖은 좌절을 경험하며 간혹 범죄의 유혹에 빠지는 탈북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봐온 그는 그나마 한국사회에 적응을 잘한 경우에 속한다.
자신의 사진이 선명한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아들었을 때 서씨는 새로운 삶에 가슴이 한없이 부풀었다. 대성공사에서 정착금 1500만원을 쥐고 세상에 나온 그는 부평의 대우자동차 공장을 첫 직장으로 삼았다. 5시30분 기상, 7시 출근, 그는 이를 악물고 새로운 삶에 뛰어들었다. IMF가 터지기 전에는 특근과 야근은 물론 토,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통일 후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자동차 조립 일로 많을 땐 월180만원이 넘게 벌기도 했다. 그러나 동료들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왜 왔어, 우리도 먹을 게 없는데…"
회사 화장실에는 '빨갱이 죽여라'는 노골적인 낙서가 등장하기도 했다. 어떤 동료는 그를 안기부의 스파이쯤으로 생각해 백안시하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아직 부모형제 처자식이 살아있지 않나.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 이 생각이 쓰러질 뻔한 그를 붙들어 세웠다. 그러길 1년여, 이제 서씨를 초대하거나 서씨에게 술 한잔을 청하는 일이 회사에선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고 일반인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이같은 일이 그를 안도감에 들뜨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IMF, 일을 하고 싶어도 주 3일 근무만 하게 돼 그가 요즘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월40만원이 고작. 그래서 충남 당진의 과수원과 천안 도로공사판 등지를 오가며 농약치기, 땅 파기 등 돈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매달렸다. 저축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통일 세상'이라는 꿈을 접을 수가 없었다.
종교라곤 접해본 적이 없는 그는 최근 이 꿈을 함께 나눌 좋은 친구들을 알게 됐다. 탈북자들의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남한의 신부와 신앙인들이 그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꿈을 함께 얘기할 수 있으리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서씨는 이들을 통해 남한 사회를 한층 더 깊이 알고 받아들일 수 있길 기원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이들이 통일의 대오에 한발 더 나설 수 있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짙은 담배연기와 함께 내뱉는 서병림씨의 희망섞인 말은 희망을 함께 지켜줄 이가 있을 때 꺾이지 않고 자라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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