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스타 교육 수사회 이 도밍고 수사는 『한국지구에서는 창설자의 시성을 위해 오래 전부터(적어도 1985년 이전부터) 매월 9일기도를 바쳐왔다』고 밝히고 『시성 전부터 성인이라 믿고 살아왔지만 실제 성인으로 공식 선포됨으로써 보다 분명히 그 분의 영성과 소명을 수행하게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2회에 걸쳐 샴빠냐 신부의 생애와 수도회의 활동 현황, 영성 등을 알아본다.
▲ 샴빠냐 신부와 수사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마리스타 사제회를 창립하고 2년만에 첫 학교를 세웠다.
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엄청난 변화, 수천 명의 성직자를 학살하는 종교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절실하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 환경이었지만 젊은 신부의 생각에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젊은 신부는 약 2시간에 걸쳐 소년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가르쳤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년은 하느님의 품안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둘 수 있었다. 젊은 신부는 기쁘기도 했지만 또 다른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가운데 커가고 있음이 걱정됐다. 젊은 신부는 돌아오는 길에 그 동안 종종 생각해오던 것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듬해 1817년 1월 2일 설립된 수도회가 바로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이고 그 젊은 신부는 창설자 '마르첼리노 샴빠냐' (Marcellin Champagnat)이다.
복자 샴빠냐신부의 생애
오는 4월 18일 시성을 앞둔 복자 마르첼리노 샴빠냐 신부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던 1789년 5월 20일 프랑스 르 로지(Le Rosey)에서 태어났다. 어린 샴빠냐는 학생보다는 교사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교육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초등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등 교육을 받지 못한 관계로 지적 능력에 있어서 항상 남보다 뒤질 수밖에 없었던 그는 14살 때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16살 때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에서 못 배운 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엄격히 단련시키는 훈련을 쌓은 그는 1813년 24살 때 리옹 (Lyon) 대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15년 부제품을, 이듬해 7월 22일 사제품을 받고 리옹교구 라발라(Ra Valla)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사제가 된 샴빠냐는 '교육을 통한 사도직 수행'이라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마리스타 사제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했다.
샴빠냐신부는 1816년 10월 28일 '하느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소년'을 만나면서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더욱 확연히 깨닫는다. 마침내 신학교 시절부터 늘 생각해왔던 평수사들로만 구성된 교육 수도회 창설을 결심하고, 이듬해 두 젊은이와 함께 실행에 옮겼다.
초창기 수사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해야했다. 가난 속에서 기도와 노동과 공부로 하루하루를 살았으며 많은 이들의 몰이해와 비난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때로는 질병과 실의, 좌절을 겪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눈사태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의연히 맞서 이겨낼 수 있었다. 샴빠냐 신부와 첫 수사들의 피나는 노력은 수도회 설립 2년만에 첫 학교를 세울 수 있었고 이후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다.
1824년 수도원이 세워지고, 28년에는 수도회의 규칙서가 작성됐다. 1840년 6월 6일 샴빠냐신부 선종 당시, 앞서 선종한 92명을 빼고도 280명의 수사가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은 48개의 학교를 운영하면서 창설자의 교육 이념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1851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고 1863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도 인가를 받았다. 1920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샴빠냐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했고, 사후 115년 만인 1955년 5월 29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1998년 시성조사가 완료됨에 따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는 4월 18일 오전 10시 로마 성 베드로대성당에서 샴빠냐신부 시성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이번 시성식에서는 '천주 섭리의 가난한 종 수도회' 창설자 조반니 칼라브리아신부와 '애덕 수녀회'창설자 아고스티나 리비아 피에트란토니도 함께 시정된다. 이들 수도회는 아직 한국 교회에는 진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