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자들은 해외에서 식민지 영토를 확장하고 금, 은 보석을 찾으러 유럽을 떠났다. 선교 보호권에 따라 정복자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선교사들도 동행하였는데 점령지에서 식민주의자들의 광적인 착취행위를 은폐하는데 정복자들이 선교활동을 자주 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도 자행되어 희생자들의 수가 학자들에 따라 과장되어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식민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폭력과 함께 희생자들의 숫자에는 원주민들에게 전혀 면역성이 없는 홍역과 천연두 같은 병이 유럽인 정복자들에 의해 원주민들에게 전염되어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또 강제노역에서 탈진하여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하여간 수많은 원주민들의 죽음은 유럽의 정복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아메리카 대륙을 개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하고 감소하는 원주민들을 보충해야 했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잡혀온 흑인을 노예로 거래함으로써 서유럽에서 이미 사라진 노예매매가 다시 확산되어 1400~2000만명의 노예들이 수송되었다.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들 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 노예들의 처지는 그들의 피부 색깔과 얼굴 모습 때문에 더욱 처참하게 취급되었다.
노예매매 다시 성행
흑인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는데 원주민들의 권익을 옹호 하기 위해 헌신한 라스 카사스(Las Casas)와 같은 인물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수회의 베드로 클래버(Pierre Claver) 처럼 흑인들의 처지를 많이개선한 개별적인 애덕 활동을 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선교란 그리스도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파견」되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과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선교」는 교회사명의 본질에 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는 그 지역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 그리고 그들 고유의 종교심을 이해하고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과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인류 최악의범죄였다. 596년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원시적 자연민족의 사고방식에도 눈을 돌릴 줄 알았던 최초의 교황으로서 영국에 선교사들을 파견하면서 가능한 한 前그리스도교적 기존 종교관습에서 연결점을 찾고, 또한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내용으로 완성하도록 권고하였다.
높은 산을 기어오르려는 사람이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한 발짝 서서히 오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되 성급하게 결실을 보려하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교황은 어떠한 경우에도 점령지에서 영신적인 목표를 망각하지 않도록 강조했지만 정복자들의 탐욕을 억제하는데 영향력을 별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정복자들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는 원주민들의 노예화에 대하여 상반된 사고방식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원주민들을 직접 접촉하는 일선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옹호하며 노예제도 자체를 죄악으로 단죄하였고 식민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내는 교직자들을 비롯하여 일부는 노예제도를 자의반 타의 반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였다.
어떤 신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탓으로 또 사람들 사이에 으레 있게 마련인 자연적인 불평등으로 이미 노예로서 운명을 타고났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안토니오 데 에스삐날(Antonio de Espinal) 등 일부는 원주민들이 완전한 시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노예신분에서 적어도 3대(代)는 지나야 한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11년 산 도민고(San Domingo)에서 도미니꼬 수도회원인 안토니오 데몬떼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 신부는 '여러분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원주민들을 이렇게 참혹하고 잔인하게 노예로 부리고 있습니까? 이와 같은 여러분의 상태에서는 터키인들이나 무어인들 보다 여러분의 영혼을 구할 수 없습니다' 라고 강론하며 그 죄악상을 고발하였다.
노예제도 찬반 의견 분분
이는 식민주의 전성기에 이르고 있던 당시로서는 전례(前例)가 없는 충격적인 내용으로서 식민주의 당국과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관구장은 파문의 경고와 함께 노예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거론하지 않도록 '거룩한 순명' 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노예문제는 공공연한 논쟁거리로 떠올라 원주민들은 자기네들의 권리의식을 자각하기 시작하였고 스페인에서는 양심의 문제로 제기되었다.
수도자, 군주, 신학자, 교황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10여 년간 논쟁했으나 '신중함을 위하여' 결정을 철회하였다. 그후 교회 당국은 정책적으로 노예 제도 자체를 죄악으로 단죄하고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1537년 5월 28일 바오로 3세 교황(1534~1549)은 『교회 밖에 있는 원주민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구원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의 자유는 박탈될 수 없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할 수도 없으며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설교와 모범으로 그들이 「생명」에로 초대되어야 한다』는 교서를 발표하면서 인종주의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예제도를 파문벌로 단죄하였다. 닷새 후에 『원주민들과 다른 민족도 비록 그리스도교 신앙을 모르고 살더라도 합법적이고 자유롭게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그들을 노예로 삼을 수 없으며 노예에 관한 모든 계약은 무효』라는 교서를 다시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삐오 5세 교황(1566~1572)이 1568년에, 우르바노 8세 교황(1623~1644)이 1639년(Commissum nobis) 에 노예제도 금지교서를 발표하였는데,
베네딕도 14세 교황(1740~1758)이1741년(Immensa pastorum) 에도 교서를 발표하여 신분, 성(性), 조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디안들」을 노예로 삼거나 이를 목적으로 그들의 고향에서 다른 먼 곳으로 수송하는 행위를 파문하도록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에게 명하였고, 역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1831~1846)도 1839년에이와 비슷한 교서를 발표하였다.
거의 비슷한 내용의 교서가 반복되어 발표되었다는 것은 교서의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 선교사들이 타고 가는 배의 소유주인 정복자들과 상인들에게 신변의 보호와 재정적인 모든 문제를 의존해야 했던 선교사들의 활동이 식민주의 정책에 반대되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권력과 재물에 이해관계를 깊이 맺고 있는 식민주의자들과 이들이 제공하는 호의와 특권에 만족한 일부 선교사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순수한 선교 사명을 망각했거나 선교를 극단적으로 그리스도교 우월주의에서 해석하여 개종을 강요한 일부 선교사들도 복음정신과는 동떨어진 선교활동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원주민 이교인들을 본국의 이단자들이나 배교자들과 동일시하면서 이미 교회에서 단죄된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원주민들을 다루기도 하였다.
본국 이단자들과 동일시
그러나 원주민들의 권리를 옹호했던 선교사들 가운데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바르똘로메오 데 라스 까사스 (Bartolome de Las Casa, 1474~1566) 신부가 유명하다.
원래는 그 자신이 식민주의자로서 자기 농장에서 원주민들을 착취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여 원주민들의 권익 보호와 구원을 위하여 일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도미니꼬회의 수사신부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원주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잘 알았으므로 이에 대한 그의비판은 구체적인 사실에 의한 객관적인 고발이었다. 그는「모든 인간에게 신앙을 선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글에서 애덕생활의 모범과 함께 원주민들을 설득시키는 온화한 사도적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재강조되었다.
1545년 주교가 되었지만 현지 식민주의자들의 적대적인 모함으로 1547년 스페인에 영구 귀국하였다. 귀국해서도 그는 식민지의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에 동조하는 다른 도미니꼬회원과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꼬 회원들도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원, 학교, 수도원 등을 원주민들의 주거 지역에 설립하기도 하였다. 빠라라(parara), 파라과이(Paraguay), 우르과이(Urguay) 세 강의 지역에서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원주민들을(Reduccion) 정착촌에 살게 하여 식민주의자들의 착취와 노예매매로부터 보호하였다.
1610년부터 시작된 이 정착촌은 30여개의 정착촌으로 증가하여 약 50만 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였다. 온전히 그리스도교적인 기초 위에 공동 생활이 조직되었다.
각 정착촌은 2~3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파라과이에서 장상은 그들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세습적인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고 모든 것이 공동 소유였다.
파라과이는 유토피아를 실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759년 정착촌의 한계를 규정하는 협약으로 스페인 식민지의 원주민 정착이 포르투갈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1768년 예수회 활동이 금지되면서 정착촌들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정복한 유럽의 정복자들은 어떤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졌을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의 하나인 선교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들과 함께 점령지에 들어간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선교사명과 원주민 박해
선교사들은 식민주의자들의 만행을 종교의 이름으로 합리화시킨 그들의 앞잡이였을까? 정복자들과 많은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문명과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야만스럽게 대하였다.
교회가 정책적으로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학살하는데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이름으로 파견된 일부 선교사들과 교회의 가르침을 받은 식민주의자들의 만행으로 희생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겸허하게 용서를 청했다.
철없는 자녀들의 잘못을 부모가 대신 용서를 청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근거 없는 과장도, 광신적인 호교적 태도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미래를 보다 희망적으로 발전시키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교사들은 파견된 지역에서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이사 58,6) 일부터 시작하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교회의 역사적 과오들」을 집필해 주신 김희중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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