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에서의 기나긴(?) 하루를 보낸 영등포교도소의 재소자들, 좁은 창으로 스며드는 마지막 햇살과 함께 저녁을 마친 이들에겐 또 다른 일과가 펼쳐진다. 갖가지 숙덕거림으로 자칫 힘들어질 수 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맞는 나락과도 같은 밤, 그런 밤을 지키는 문지기같은 존재가 있어 이들의 겨울밤은 다소나마 따뜻한 색조를 머금게 된다.
이상춘(60) 교무과장, 올 6월로 정년을 맞는 그의 눈은 색바랜 교도소의 담장과 쇠창살을 뛰어넘어 온누리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저녁 7시, 전국 30여개 교정시설의 재소자들은 낯도 모르지만 어느덧 친근해져 버린 목소리에 저녁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과장이다.
1963년 처음 교정공무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1976년 영등포교도소(소장=안현석) 근무 때부터 시작된 이과장의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자교육은 사반세기를 바라보게 됐다.
재소자들이 출소 후 보다 사회에 적응을 잘하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한자교육이었다. 생활용어의 70%, 전문,학술용어의 90%를 차지하는 한자를 모르고선 사회적응이 쉽지 않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특별나게 한자를 잘 알거나 잘나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눈앞을 떠나지 않는 재소자들이 안타까워서 시작한 일이었을 뿐이다.
"하지 마라는 얘기보다 좋은 일을 권하다 보면 자연히 나쁜 일과 멀어지지 않겠는가 싶어 시작했지요" 빤히 바라보이는 공무원 월급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어찌보면 이과장의 시작은 무모한 것이었다. 어렵사리 1000여부의 한자교재를 구해 첫 수업을 시작했다. 매일 퇴근 시간을 늦추며 40여분간을 소내 방송마이크를 잡고 재소자들을 위한 한자교육에 열을 올렸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가족들이 넣어준 영치금을 주체하지 못하던 재소자들의 씀씀이가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감옥에서 먹는 일이 전부이던 재소자들이 책을 사보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한자교육은 놀라운 성과를 낳았다. 그가 옮겨다닌 교정시설마다 한자능력검정시험에 응시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고 지난해에는 대졸자도 엄두내기가 힘들다는 1급에서 최고득점자를 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그의 방송강좌는 교정시설이라면 모르는 데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강좌가 되다시피했다. 그의 이같은 노력은 적잖은 후원자를 낳아서 서울대교구 최창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일에 힘을 보탰다. 급기야 전국의 재소자를 위해 직접 한자교재를 만들어낸 것이 지난 97년. 좥방송 따라 5000자좦. 전국 재소자 중 반 이상인 4만명에게 이 책이 무료로 보급됐다.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지요". 매일 그의 방송강좌를 듣고 있을 재소자들을 떠올리며 그는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워왔다고 밝힌다. 그래서 이과장은 그의 강좌가 공부가 아니라 생활을 나누는 한자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정년을 앞둔 그는 조그만 꿈을 밝혔다.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재소자들이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최근 온갖 정성을 쏟아 새롭게 펴낸 한자교재를 전국의 재소자들에게 안겨주는 것. 그는 이미 이 책 1만권을 재소자들의 몫으로 마련해 놓았다. 다만 전국의 7만 재소자 모두에게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함께하실 분=영등포교도소 이상춘 (02)682-3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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