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잔인한 동물? 언젠가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동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무엇이 제일 잔인한 동물일까? 며칠 전 자모원에 들러 미사 중에 같은 질문을 했더니 구원이는 뱀이 제일 무섭다고 하고, 그 옆에 앉은 구원이 친구는 사람이 제일 무섭단다.
왜 사람이 제일 무서우냐고 물으니까『무서운 뱀을 사람이 죽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어떻든 내게 질문한 분의 답변인 즉, 사람과 많이 접촉한 동물이 제일 잔인하단다. 그러니 결국 사람이 제일 잔인하다는 말이다.
인간이 잔인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미를 잃어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다움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 있고, 사랑은 인간이 가야할 길이 아닌가?
이 인간미는 마음의 귀로 들을 줄 알고, 마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가능한 것인데, 오늘날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닫았으니 어찌 인간미가 있겠는가? 낙태허용법 (모자보건법) 폐지를 위해 길거리에서 서명을 받으며 쉽게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서명을 피하여 그냥 지나가는 이들 대부분의 표정은 차갑고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릇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가는 것은 경직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다우려면, 즉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잘 살려면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볼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눈물을 흘리는 곰
점심 시간에 곰 사냥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사람이 20여년 동안이나 즐겨하던 사냥을 그만 두었단다. 그가 사냥을 그만 둔 이유는 결국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자기가 쏜 총에 맞아 죽어 가는 곰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 더는 총을 들 수 없었단다. 본다는 것이 이리도 중요한 것인가? 미국에는 생명 수호운동이 매우 활발하다.
그리고 낙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고, 그들은 「낙태는 곧 여성의 권리」라고 부르짖는다. 그런 여인들 중 하나가 「낙태지지」를 떨쳐버렸다.
어느 날 그녀는 12주된 아기의 팔다리가 잘리어 낙태되는 장면을 비디오에서 본 것이다. 그 뒤 그녀는 더 이상 낙태찬성을 외칠 수가 없었다. 『그래, 내 집에 있는 고양이라도 누가 저렇게 갈가리 찢어 죽인다면 내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태아들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태어난 아기가 어쩌다 의료사고가 나도 언론은 야단법석인데, 왜 매일 거듭되는 4000여 낙태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것일까?
유신 독재를 청산한 오늘의 문민정부이지만 어떻게 생명과 인권에 관한 법들에 대해서는 그리도 인색하고, 특히 낙태허용법인 모자보건법의 독소조항은 여전히 방치해 두는 것일까?
잉태되는 순간부터 존엄한 인간이라고 가르치는 교회마저도 매일 낙태되는 아기들을 태어난 아기들과 차별하여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도다" 고 매일 성모송을 되풀이 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70∼80%가 낙태를 부분적으로든 전적으로든 허용하기를 바란다고 응답한 적이 있으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들어도 못 듣고, 보아도 못 보는 것은 마음이 없어서라고 노자는 말하였는데, 이 땅의 불교, 개신교, 천주교 신자들이 태아들의 침묵의 절규를 제대로 못 듣는 것은 과연 들을 마음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미를 상실한 것인가?
작은 것부터 달라져야
문화란 철학적으로 볼 때 진리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평가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그 국가 혹은 시대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 취급했느냐』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과거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는 낙태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옛 우리 어른들은 태어날 아이를 지금처럼 차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육을 태중부터 시켰고, 태어나면 한 살로 여겼다. 그것은 우리 어른들이 볼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쩌다 「죽임의 왕국」을 이루었는가? 병을 치료하려면 병든 기간의 1/3에 해당하는 치료기간이 필요하다는데, 그동안 30여년간의 정부의 조직적인 낙태조장, 그리고 의료계, 언론계, 종교계와 학계의 침묵과 방조로 비롯된 「죽임의 병」을 치료하려면 얼마나 세월이 걸려야 하는 것일까?
이제 새천년에 우리가 달라져야 하는데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최근 모자보건법 폐지 100만인 서명운동과 사형제도 폐지운동 등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남모르는 땀을 흘리고 있으니, 새시대 새변화는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생명의 문화가 겨자씨와 같은 「살림의 수고」로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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