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식구들이 아직 잠든 이른 시간에 오늘 아침 식사 당번인 최요한(가명)씨는 정성이 가득 담긴 따뜻한 밥을 짓기 위해 분주히 손을 놀린다. 텃밭에서 직접 수확한 고추, 상치, 시금치 등이 오늘 반찬메뉴. 최씨는 푸짐한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기쁜 맘으로 맛있게 먹을 식구들을 생각하면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경북 칠곡군 연화리에 위치한 결핵환자들의 마지막 안식처 '보금자리'. 혹자는 '죽음의 골짜기'라고도 부른다. 무연고자들에다 치료가 늦어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바로 보금자리다. 조용히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곳. '보금자리'란 말에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고 이곳 관계자는 전한다.
아침 7시30분. 남자 6명, 여자 2명해서 8명의 식구가 둘러 앉아 식사를 한다. 이들은 밥을 먹으며 서로의 얼굴을 다시금 살펴본다. 몸은 어떤지, 어젯밤 별일은 없었는지…. 그래서 이들의 아침식사 시간은 어떤 가족보다 정겹고 화기애애하다.
8시30분 아침기도가 끝나면 각자 맡은 일거리로 하루를 연다. 개. 닭. 공작새 먹이주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집안 청소 하는 사람 등. 하지만 그나마 조금 움직일 수 있는 2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노동력이 거의 없는 상황. 무리하면 안되기 때문에 쉬엄쉬엄 몸을 움직인다.
20년째 병을 안고 사는 이영숙(가명)씨. 이씨는 결핵 휴유증으로 기관지 확장증, 천식 등이 복합적으로 와 숨쉬기 조차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다른 가족들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동안 방에 앉아 조용히 묵주기도를 바친다. 꿈과 희망이 가득찼던 젊은 나이에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비참한 인생. 많은 날들을 끝없는 고통속에서 방황해야 했다. 가족마저 그를 외면해버린, 더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여러 시설을 떠돌다 85년 보금자리가 생길 때 이곳에 정착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이영숙씨. 그럴때 그에게 다가온 작은 사랑이 그의 마음에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보금자리 책임 수녀들의 헌신적인 사랑. 이씨는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며 다시 삶의 기쁨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많은 은인들의 진심어린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며 신앙을 받아 들였다. 이씨는 신앙인이 되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때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쁨과 희망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육신의 고통은 주님께 맡긴채 그는 요즘 매일 보금자리 가족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 드린다.
"제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 드리지는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편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거니까요. 다만 우리 가족들이 주님의 사랑을 마음속 깊이 체험하고 기쁘게 생활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새해부터 보금자리 식구들은 성서필사를 시작했다. 요즘 이들에겐 이 일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젊은 시절 목장에서 일했다는 권정수(가명)씨도 성서 쓰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푸른 초원에서 소들을 키우며 자신의 꿈을 펼쳐왔던 권씨. 그도 결핵과 함께 자신의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됐다. 그로부터 몇년동안 전국을 전전하던 권씨는 어느 수녀의 소개로 이곳을 찾게 됐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됐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보금자리에서의 생활은 작은 희망의 불씨를 가져다 주었다. 자신보다 더 고통받고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밝고 기쁘게 생활하는 동료들을 보며 권씨는 마음을 다잡곤 한다.
여기서 삶을 마감한 동료들도 몇명 있었다. 초창기 때 있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운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보금자리 식구들은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떠나 보내는 슬픔보다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행복이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기쁜 맘으로 죽은 동료의 영원한 안식을 주님께 간절히 기원한다.
현재 자신이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기적같다는 이수연(가명)씨는 보금자리 식구들과 함께 가는 성지순례가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인정(세레나)수녀와 더불어 촛불을 앞에다 두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던 작년 크리스마스가 무척 기억에 남는다고. 예수님께서 아주 보잘 것 없는 이곳 보금자리에도 탄생하셨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당시의 감동을 전한다.
"저에겐 좋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어요. 우리에겐 주님의 든든한 빽이 있잖아요"
보금자리 식구들의 새해 소망은 한결같다.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함께 생활하는 동료들과 한 신앙안에서 더불어 사는 것. 작은 밭이지만 채소도 가꾸고 가축도 키우며 오손도손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바람이자 희망이다. 99년 '성부의 해'를 여는 이들의 마음은 성령의 은총으로 더없이 충만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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