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밥이다". 삼삼오오 도시락을 타러왔던 아이들의 입에서 빙그레 웃음이 물렸다. 서울 최후의 빈민촌이라 불리는 관악구 신림동 난곡마을, 입성으로는 구별이 가지 않는 이 곳 아이들도 여느 때와 달리 김밥이 도시락으로 나오자 신이 나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들이다. 쪼로록 달려가는 모습이 어디 자랑할 데라도 있는 듯하다.
이제는 좁은 도로가 난 예전의 산골짜기를 두고 마주한 신림 7동을 비롯해 신림지역 다섯개 행정동을 일컫는 난곡마을, 이곳의 겨울은 쓸쓸함과 따뜻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맑은 날엔 멀리 여의도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달동네, 난이 많이 난다고 해서 이름붙은 이 마을은 예의 난향은 간 데 없고 삶에서 걸러진 듯한 걸쭉한 사람내만 풍겨온다.
이곳에서 지난 1991년부터 10년 가까이 냉랭해져만 가는 인심을 데우며 훈훈한 난로 역할을 해온 난곡 주민회관(대표=김혜경)은 25평 그 규모 이상의 의미로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간다. 이제 지역에서는 팔순의 어르신들부터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예사로 드나드는 난곡 주민회관은 단순한 동네 사랑방 역할을 뛰어넘어 주민들의 지킴이로 자리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도시인 일반의 통념 속엔 자리해 본 적이 없는 가난 그 자체로 살아가는 이곳 주민들에게 삶은 그저 살아지는 생명의 연장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기에 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선 난곡 주민회관은 이들의 버팀목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낮은 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집, 다닥다닥 붙은 방을 끼고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 곳에서 그나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난곡 주민회관과 같은 존재가 곁에서 이들을 지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최윤정(글라라)씨, 그리고 지역에서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알음알음으로 연결된 자원봉사자들이 회관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이다. 컴퓨터가 이채롭게 다가오던 난곡동에서 낡은 컴퓨터 3대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컴퓨터 교실을 시작한 것이 지난 95년, 이제는 8개 반으로 늘어난 식구들로 컴퓨터 앞은 항상 분주하다. 한글반을 만든 것도 문맹이 유난히도 많은 이 곳 주민들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량한 환경으로 크고 작은 갖가지 병을 지니고 사는 주민들을 위해 당장 목돈이 들어가지 않는 수지침과 단전호흡 등을 가르치게 된 것도 이 곳에 자리하게 되면서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IMF가 불어닥친 이후 더욱 냉랭해져 버린 지역의 공기를 데우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지난해 겨울. 막노동과 파출부 자리마저 끊기자 가출하는 가장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고 마을 곳곳에서는 고아 아닌 고아들이 생겨나 주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다시피 했던 회관 실무자들은 안타까움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했던 일이 도시락 나누기였다.
회관의 좁은 공간을 열고 '실업극복국민운동'의 도움으로 급한 대로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지원금은 100명분인데 굶는 아이들은 그 배에 이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아이들을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 가운데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기 시작했을까, 쌀이 떨어질 만하면 쌀독이 다시 차고 부족함이 느껴질 때면 누군가가 그것을 메워 주었던 것이다. 하루 평균 180여명의 결식아동들이 찾고 있는 요즘, 최윤정씨는 아이들의 방학이 끝날 때가 은근히 걱정스러워진다.
"그나마 지금은 근근히 도시락 숫자를 맞출 수 있지만 개학할 때쯤이면 친척집이나 아는 곳으로 겨울을 나러 갔던 아이들이 하나 둘 돌아올 텐데…" 지원금도 2월말까지만 예정돼 있다. 그러나 최씨를 비롯한 회관 식구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가난한 동네에 살면서도 지금껏 한번도 쌀통이 빈 적이 없었다. 이곳엔 희망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주실분=농협 100117-56-050426 최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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