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2월, 입춘은 지났지만 여전히 겨울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차가운 날씨였다. 빈민들의 벗으로 살다 간 고(故) 제정구 의원은 김수환 추기경, 평생의 동지인 정일우 신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양평동 뚝방 동네의 5평짜리 허름하기 짝이 없는 판잣집에 함께 앉아 있었다.
사랑방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김추기경은 미사 중에 이 작고 소박한 사랑방에 '복음자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9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제정구 의원이 평생을 빈민들과 함께 한 삶의 자리 '복음자리'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76년 '복음자리'마을 탄생 판잣집 빈민들과의 삶 시작
이듬해 4월 양평동이 강제철거되고 제정구씨가 지역주민을 이끌고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으로 집단이주하면서 그 이름을 딴 '복음자리' 마을이 시작됐고 황량한 벌판에 75개의 대형 천막으로 이뤄진 이 마을은 그에게 좥따뜻한 불빛으로 생각나는 이름좦이 됐다.
빈민들과 함께 살아온 공로로 86년 정일우신부와 함께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인 좥막사이사이상좦을 받을 때 함께 고락을 나눈 주민들은 이 상을 '천막'사이사이상이라고 부르며 기뻐했다. 79년에는 시흥동, 봉천동, 망원동 등지에서 철거당한 사람들이 모여와서 '한독마을'을 이뤘고, 85년 목동 철거싸움을 통해 함께 모여와서 지은 마을이 '목화마을'이 됐다.
강제철거 맞서 빈민운동 투신
55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한나라당 고(故) 제정구(바오로) 의원의 삶은 세인의 오해를 가져오기도 했던 정치권 입문에도 불구하고 도시 빈민들과의 외길 한평생이었다. 제의원의 장례미사를 집전한 김추기경은 강론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삶들을 자기와 같이 사랑한, 예수님을 닮아 살아온 분"이라고 회고했다.
44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6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에 뛰어든 후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5년형을 언도받는 등 암울했던 군사 독재 정권 시절 내내 시련의 세월을 지내왔다. 그는 특히 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교사로 일한 후 가난하고 소외받는 계층과 고락을 함께 해 77년 복음자리 마을 건설에 이어 80년대초 천주교 도시빈민 사목협의회를 결성, 목동과 상계동 등 강제철거 대상 빈민촌을 중심으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그의 판자촌에서의 평생은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이었다.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을 자기와 같이 사랑한 사람
민주화 투쟁과 빈민운동으로 항상 낮은 곳에 머물러 있던 그는 88년 한겨레민주당 공동대표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92년 14대 총선때 통합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시흥.군포에 출마해 당선됐고 96년 재선됐다. 97년 대선 때 옛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그가 현실 정치에 뜻을 두었을 때 그를 아끼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깊이 우려했다. 당시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였던 정호경신부는 "왜 그 지저분한 곳에 발을 담그느냐"며 말렸고 백령도본당 주임 호인수신부도 밤새 그만둘 것을 권고했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이해했던 아내 역시 정일우신부를 동원해 말렸으며 김추기경도 마찬가지였다.
정일우신부는 11일 국회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조사를 통해 제의원의 심중을 이렇게 말했다. "정구의 견해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의 모든 독물을 마시고 가셨듯이 양심이 있는 사람이 정치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부는 "정구도 정치판에 들어가 많은 독물을 마셔야 했다"며 "생각보다 독물이 훨씬 많아 결국 암에 걸려 죽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를 개혁하고 쇄신하려는 노력은 그 성과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의정활동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92년 '깨끗한 정치를 위한 자정 선언'을 주도했고 95년 국민회의 창당으로 통합 민주당이 분열될 때 민주당에 잔류했다가 96년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해 사무총장을 맡았다. 한나라당에 합류한 뒤에는 '희망 연대'를 조직하는 등 개혁에 앞장섰다. 투병 중인 지난해 국정감사 때에는 병상에서 서면질의로 국감을 펼쳤다.
지난해 9월 폐암을 선고받고 투병에 들어간 그의 병실에는 쾌유를 비는 동료의원과 지역구민들의 성원이 가득했다. 12월 29일 열린 '제의원의 투병을 격려하는 후원의 밤'에는 그가 "의정활동도 제대로 못하는데 무슨 후원회냐"며 참석을 하지 않았음에도 1000여명의 후원자들이 몰렸다.
구도자로서의 삶 간절히 염원
참 인간의 길을 걷기 위한 노력이 곧 구도의 길이라면 고(故) 제정구 의원의 삶은 구도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도자로서의 삶은 제의원 자신이 염원하던 것이었다. '신부와 벽돌공'이라는 제목의 책 서문에서 자신이 독자들에게 구도자로 남아 있기를, 그리고 그 삶이 작품일 수 있다면 그 작품을 만들어낸 분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감지되길 바라는 마음을 적고 있다.
김추기경은 12일 명동성당 장례미사에서 "제의원은 우리들에게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을 사랑해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그들을 형제로 대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라며 좬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그치지 말고 그의 삶을 따라 모든 이들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하자좭고 말했다.
◆ 꺼지지 않을 불씨 - 정구를 기리며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70년대 초부터 빈민운동을 함께 시작한 평생의 도지이자 막사이사이상 공동수상자인 미국인 정일우 신부(예수회)가 고인을 보내며 적은 글이다. 이 글은 2월 12일 국회장에서 조사로 직접 낭독했다.
이게 무슨 일이요? 내가 여기에 서 있고 정구, 자네가 거기에 누워있는 이 너무나도 거꾸로된, 거짓말과 같은 현실 말이요.
1973년 12월 청계천 뚝방, 서울대에서 제적당한 29살의 한 젊은이를 만나 속 됨됨이의 한가운데에 불씨와 같은 매력을 느끼고선 완전히 반해버린 것, 그리고 그 불씨의 뜨거운 열이 모든 벽을 녹여 우리를 완전히 하나로 만들어낸 그 은총.
정구의 빈소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과 정구의 첫사랑 도시빈민들을 보면서 청계천에서 내가 느꼈던 그 불씨가 하나도 식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조문객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젊은이였다는 것을 보고서 자네가 정말 잘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불씨는 정구를 청계천에서 양평동으로 복음자리, 한독주택, 목화마을로 거기서 서울시내 모든 강제철거 현장으로, 또한 정계로 몰아왔습니다. 낙심할 때마다 주민들과 소주 한잔 마시면서 꽹과리 장단에 새벽까지 춤으로써 다시 뛸 힘을 얻었던 그 빛나는 모습과 추억들.
80년대 수십 곳의 강데철거 현장의 악몽과 지옥같던 끔찍한 폭력 가운데 정구의 표정과 마음, 그 불씨는 조금도 주저할 줄 몰랐습니다.
강제철거라는 악마가 정구를 정계까지 몰아갔을때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철거민들을 이용해 먹는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치판이 하도 혼탁하기 때문에 히애햐 한다고 말했지만 정구는 그 때문에 양심이 있는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독물을 마시고 가셨다』. 정구도 정치판에 들어가 많은 독물을 마셔야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독물이 많아 결국 암에 걸려 죽었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았는지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정구가 뿌렸던 그 많은 빛의 씨앗들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마음밭에 떨어져 영원히 열매를 맺을 것이기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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