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수발에 삼형제 뒷바라지에 한숨이 그치지 않았던 당신. 두 팔을 걷어 부치고 파출부 일부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왔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합니다…" "그분께서 새롭게 묶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교구 선교국(국장=김준철신부)이 주관하고 혜성관광과 필리핀항공이 협찬한 가운데 펼쳐진 3박 4일간의 '부부일치를 위한 필리핀여행'의 막바지, 2월 21일 밤 필리핀 현지 숙소에서 열린 혼인갱신식에서는 가슴 뭉클한 고백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신혼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갖가지 사연들이 짧게는 1년, 길게는 27년만에 떠난 구혼(舊婚)여행의 현장에서 새롭게 열매를 맺고 있었다.
2월 19일 밤 9시 김포공항, 대부분 첫 해외나들이에 나선 27쌍의 부부들 얼굴에서는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최고령자 김여원 (베드로.78.서울 월계동본당) 신풍자 (안토니아.58)부부를 비롯해 최연소자 정필문(25) 최문주(24)부부 등 반세기에 이르는 나이 차이도 신혼이라는 한마디에 한마음인 양 녹아드는 듯했다. 4시간에 걸친 여정 끝에 도착한 필리핀 해안가에 위치한 숙소는 새벽에 그 베일이 벗겨지면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길지 않았던 밤마저 뜬눈으로 새웠다는 이들이 대부분. 빗발이 간간이 흩날리는 필리핀 마닐라는 그래도 상하(常夏)의 기운이어서 신혼여행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신혼여행의 첫 목적지는 마닐라 최고의 절경이라는 '팍상한폭포', 1시간30분에 걸쳐 7㎞의 강을 따라 올라가는 뱃길은 속옷마저 흠뻑 적셔 놓았다. 그러나 부부들의 입에서는 웃음과 탄성이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대로 애처로운 눈빛에 찢어진 티셔츠 헤진 바지를 입은 현지 뱃사공 두명이 이끄는 통나무배는 잊지 못할 추억을 부부들에게 새겨 놓았다. 속는 일인지 알면서도 뱃사공들의 애처로운 표정에 마음 약한 한국의 신혼부부들의 지갑은 연신 열렸다 닫혔다. 이날 밤 숙소로의 귀행길에 들른 한국식당은 이들에게 또다른 기억으로 남을 만했다. 현지식(現地食)에 입맛을 잃은 이들은 고춧가루를 어설프게 버무려 놓은 김치와 된장국을 비워내며 감격을 금치 못하는 표정들.
이국의 날씨와 음식, 매끄럽지 못한 여행지 연계 등으로 짜증이 나던 신혼부부들의 마음이 새롭게 채워진 건 셋째날 롤롬보이 김대건신부 유적지를 돌아보고 현지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부터이다. 빗발이 치던 전날에 비해 해까지 나타나 반겨주던 이날 미사에서 김준철신부는 하느님나라는 가정에서부터 이뤄져 확산돼 나가는 것임을 강조하며 변함없는 신뢰로 배우자에게 헌신하길 기원했다. 이국인의 손에 비록 규모는 적으나 깨끗하게 단장된 성인의 유적을 보며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손을 꼭잡고 다니는 부부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맞잡은 손에서는 싱그러움이 넘쳐났다. 어색해하던 마음이 어느덧 신혼 첫날의 설레임을 되찾은 것일까. 이날 밤 혼인갱신식을 하면서 진실어린 포옹과 눈물이 지켜보던 이들마저 감동케 하였다. "주님, 하나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꼭잡은 손을 통해 울려 나오는 외침은 남은 생이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여운으로 남을 듯했다.
◆ 신혼여행에서 만난 사람 - 국경을 뛰어 넘어 사랑 이룬 차윤부·장성복 부부
“콜롬보이 김대건 신부 유적지에서 봉헌된 미사에서 난생 처름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독서를 해본 게 가장 기억에 남아”
『이번 여행은 하느님께서 저희 부부가 앞으로 더 열심히 살라는 뜻에서 불러주신 것 같습니다』
서울대교구 선교국이 주관해 2월 19~22일 3박4일동안 열린 「부부일치를 위한 여행」에서는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이 시종 화제가 됐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서울 사당동본당 차윤부(요셉·35) 장성복(마리아·35)부부.
지난 97년 6월부터 반년간에 걸친 전화교감 끝에 남편 차씨가 중국 연변 용정시로 부인 장씨를 맞으러감으로써 그해 겨울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됐다. 한국에 나와 있던 장씨의 언니 소개로 사진을 주고받은 이들은 매달 50~60만원의 통화료를 쓰면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경을 쮜어넘는 사랑을 키워왔던 것.
두 사람 다 한가정의 가장이다시피 해 기약없이 늦어지기만 했던 결혼은 이렇게 맺어질 것을 준비했던 모양이다.동갑내기에다 서로 이해하는 마음마저 깊었던 부부였기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교회도 함께 찾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영세를 하게 된 것이 지난해 성탄절. 어렵게 맺어진 이들의 사연을 알게 된 다른 부부들은 여행 내내 차씨 부부의 방을 사랑방 삼아 드나들며 둘째날 밤에는 한국 풍속대로 신랑다루기를 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안내자의 설명이나 일상적 농담을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눈이 휘둥그래지는 장씨를 위해 그때 그때마다 설명을 해주는 차씨의 모습도 여행 내내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돴다. 용정에서 한식요리사로 일하며 보통 사람 네다섯배 수입을 얻었던 장씨. 처음엔 철골조립기술자인 차씨가 살아가는 모습에 실망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작업현장에까지 데리고 다니며 거리낌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차씨에게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의 솔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저를 온전히 사랑해 줄 것이라는데 확신이 선 것이지요』
여행일정 내내 웃음과 함께 손을 놓을 줄 몰랐던 두 사람은 롤롬보이 김대건 신부 유적지에서 봉헌된 미사에서 난생 처음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독서를 해본 게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한 입으로 말한다.
『아직 하느님을 잘 모르지만 함께 했던 좋은 불들을 통해 하느님을 조금을 알게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들을 통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날 밤 혼인갱신식에서 혼인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긴 차씨 부부의 맞잡은 손에서는 굳건한 믿음과 사랑이 넘쳐나고 있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