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놈 천주교 하느냐』
『예, 합니다』
『네 이놈 천주교 안 믿는다 하면 안 죽인다』
『대대로 믿어온 하느님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이 대답에 몽둥이 찜질이 시작되고 결국 서상선(안드레아)은 칼에 찔려 죽음을 당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예수, 마리아, 이 몹쓸 놈들 용서…』
초기교회 박해시대 때 이야기가 아니다. 50년 전 공산주의 이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받던 전라북도 산골 공소 신자의 신앙고백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등룡리공소는 김대건 신부의 종가 직계 후손인 김양배 회장이 박해를 피해 충남 아산에서 부안 지역으로 피신해 1903년경 형성한 교우촌. 1918년 등룡리성당(지금의 공소)을 건립할 당시 단 한집을 제외한 500여명의 주민 모두가 신자였다. 또 등룡리는 산골마을인 관계로 일제치하에서도 신사 참배를 강요당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신앙생활에 충실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교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이념교육을 강조해왔다. 특히 등룡리 신자들은 초기교회의 두터운 신심을 그대로 이어받아 신앙으로 똘똘 뭉쳤고, 가톨릭청년회를 중심으로 모임과 단합이 활성화돼 공산주의 이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때문에 주변마을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등룡리 신자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음은 물론이다.
6.25가 발발하자 봉용리를 중심으로 조직된 인민군 지역자위대는(마을 사람들은 자유대라고도 부름) 등룡리 신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대치한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용태씨(김양배 회장의 손주)는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한다.
『빨간 완장을 두른 놈들이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우리 형님(당시 공소회장 김병태)이랑 박노춘, 최승호, 안복동이 재산을 몽땅 쓸어가버리는겨. 그리고는 분주소로 마구잽이로 끌고갔재』.
이때 김용태씨는 자신도 공산당원들이 노리는 요주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공소회장 등을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혼자 지역자위대와 담판을 짓고, 잡혀간 이들을 데리고 왔다. 이 일이 있은 후 가톨릭청년회원 35명은 김진태의 집에 모여 끝까지 공소를 지키고, 교우들을 보호할 것을 다짐한다. 청년들이 조직한 일명 지하공작대의 활동사는 가톨릭청년회원으로 활동했던 김용태의 고종사촌 안복동이 남긴 「인공(인민공화국)일기」에 잘 표현돼 있다. 당시 전주지목구 교구장이었던 김현배(바르톨로메오) 주교는 교구 사제들에게 피난하지 말고 신자들과 함께 머무를 것을 명했다. 공산당들의 탄압이 노골화되면서 부안본당 김반석 신부를 제외한 교구 사제단은 모두 공산당에 의해 형무소에 끌려갔다. 김신부는 등룡리공소 김병태 회장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평소 등룡리 신자들이 이웃 마을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어둔 덕분에 지역자위대도 김신부는 잡아가지 않고 눈감아줬다고 한다. 그러나 50년 9월 26일(음력 한가위), 천주교 신자들을 몰살하려 기회를 노리던 지역자위대들은 신자들 모두를 집합시켰다. 김반석 신부와 김병태 회장도 영문을 모른 채 함께 나갔으나, 누군가 『신자들 죽이려고 하니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통에 모두들 흩어져 공산당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27일 유엔군 진격소식으로 마을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인 틈에 지역자위대가 가톨릭청년회 회원들을 공격했다. 또 10월 6일 오후 5시경에는 산속 계곡 등에 숨어있던 몇몇 빨치산들이 공소를 공격했지만 다행히 공소와 신자들은 무사했다. 당시 신자들은 죽창 외엔 무기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11월 12일 오후 4시. 이날은 주일로 신자들은 미사는 할 수 없었지만 각기 무리를 지어 기도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때 온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마을은 아수라장이 됐고, 빨치산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해지자 신자들은 제각기 마을 뒷산 등으로 도망하기 바빴다. 노인과 부녀자들을 먼저 피신시킨 이정옥은 빨치산에게 붙들려 온 동네를 끌려다니며 무참한 발길질과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그래도 이정옥이 배교하지 않자 빨치산은 그의 배를 칼로 찔러 죽인다. 서상선과 방국준도 빨치산들이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조상대대로 믿어온 신앙을 버릴 수 없다며 참혹하게 칼에 찔려 죽는다. 빨치산들은 김용태씨의 집을 포함해 신자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몇몇신자들의 집에 불을 질렀는데,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남은 신자집이 바로 공소회장 김병태의 집이었다. 이 집은 툇마루만 조금 그을렀을 뿐 지금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바로 집 뒤에 위치한 공소는 전혀 손실되지 않았다. 안복동씨의 미망인 김순자씨 말에 의하면 이웃마을 사람들이 공소는 불을 질러도 불길이 전혀 붙지 않아 빨치산들이 그냥 돌아갔다며 『그 집은 귀신 붙은 집이어서 불도 붙지 않는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12월 6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빨치산들과 공산당원들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 공격대 28명을 포함한 108명이 청년회원들이 지키고 있던 공소와 김병태 회장 집을 공격했다. 제대로 된 무기가 없던 청년회원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그 와중에 강서일이 빨치산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등룡리 신자들은 크게 세차례에 걸친 공격과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때의 공격으로 다쳐 전쟁 중에 숨진 신자들은 총 29명으로 전해진다. 그중 이정옥, 방국준, 서상선, 강서일 4명은 98년 한국 주교회의 가 교황청 새순교자위원회에 제출한 한국의 현대의 순교자에 포함돼 있다.
안복동씨가 남긴 일기는 강서일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화관쓰고 성인들 따라 고운 천당. 예수님, 성모님께 무궁무진한 복락을 받겠네. 우리도 강야고버와 같이 본을 받아 좋은 천당, 고운 천당으로 따라가세』
그는 일기에서 연이어 치명의 의지를 나타내 보이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예수를 따른 치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등룡리 신자들의 순교신심은 초기교회 신앙선조들 못지 않게 깊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 하늘나라를 준비해야 한다는 진리를 누구보다 잘 깨닫고 실천에 옮겼다. 안복동씨는 일기 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지 말고, 정자나무와 같이 뿌리를 단단히 박아 천주 성교회의 주추가 되세. 세상은 헛되고 헛돼야…죽은 후에 천당영복 많이 받세…강야고버 따라가고, 서안드레아 따라가세. 방원선시오 본들 받고 우리도 천당으로 모아가세』 〈도움말 주신분=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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