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2일의 일이다. 날짜를 똑똑히 기억하는 까닭은 그날이 나의 신문사 입사 35주년 되는 사적(私的)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사규(社規)에 의한 정년퇴직이 그해 연말로 예정된 처지여서 내가 언론계에 첫 발을 디딘 입사기념일로서의 그날은 내게는 다소의 감상(感傷)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나는 갑작스러운 미국 출장길에 오른 것이다. 신문사 일이 본래 돌발적이고 그만큼 기민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여권 가지고 있어요?』라는 물음 한마디로 결정된 출장은 그 출장의 비상(非常)함 때문에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출장 목적이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장문(長文)의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는데, 미국 여행 중인 김추기경은 그 때 시애틀에 일정(日程)이 잡혀 있었다.
신문은 그 무렵 「나라 살리자」라는 제목의 캠페인을 펼쳤다. 한보사태로 나라꼴이 말이 아닌 상황에, 김추기경의 「한 말씀」으로 캠페인의 결어(結語)를 삼자는 것이 미국 특파 기획의 의도였다. 『시애틀로 가라, 거기서 추기경을 조우(遭遇)하라, 그리고 「말씀」을 하게 하라!』가 정년을 앞둔 백수(白首) 기자에게 떨어진 긴급 취재 명령이었던 것이다.
추기경 인터뷰는 남들이 보기에 마치 전담 기자라도 된 듯이 여러 차례 경험이 있지만 미국에까지 「쫓아가서」 만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고 그만큼 착잡한 감회를 갖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시애틀행 기내에서, 나는 나의 30년 가까운 추기경 쫓아다니기 기연(機緣)을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털어놓건대, 나의 추기경 취재의 대부분은 제대로 된 약속도 없이 거의 무례한 상황에서, 그나마도 말씀의 정직한 전달자라는 자신감도 가지지 못한 채 이루어졌던 것이고, 추기경의 말씀이 필요했던 그때 그 상황들은 한결같이 우리나라와 사회와 정신이 뿌리채 흔들리는 위기에 일치하다는 특징을 지녔음을 알게 한다. 지금 다시, 그러한 위기적 상황이 닥쳐와서 추기경의 말씀이 긴급하게 요청된다는 것이 나를 시애틀 출장으로 내몬 신문 경영자의 안목이었던 것이다.
나의 「추기경 쫓아다니기」는 사실 악연(惡緣)처럼 시작됐다. 1968년 4월 김수환 당시 마산교구장이 서울대교구장으로 깜짝 승임(昇任)되었을 때, 나는 「주간한국」에서 일했는데, 낙양(洛陽)의 지가를 올린다던 평판의 그 주간지는 「막내 주교에서 맏 대주교가 된 까닭 - 김수환 대교구장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했고, 그 기사를 내가 썼던 것이다. 그 기사는 다소간의 풍설(風說)을 포함하고 있고 한국 최초의 추기경 탄생을 예고하는 등 나름대로 눈여겨볼 부분도 없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접근 방법과 처리 방법이 격(格)에 있어서 「주간지적(的)」이었던 점이다. 내가 추기경을 처음 뵈운 것은 그 기사를 썼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소속과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드렸을 때 추기경께서는 『응, 거짓말 잘 쓰는 기자로군』하셨는데, 그 말씀은 물론 꾸중이라기보다 친근감의 표시였으나, 내게는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한 기억이 낙인(烙印)처럼 남아 있다.
그분이 서울대교구장 1년 만에 추기경에 서임되신 이래 우리나라가 겪은 정치ㆍ사회적 격변과, 그 고비 고비에서 추기경이 감당했던 역할은 이곳에서 다 이야기할 계제가 못된다. 다만 대교구장 30년의 현대사는 기자에게 있어서나 한국 언론에 있어서 아니 그 모든 것을 포괄한 한국 사회 전체에 걸쳐 세계사적인 또는 세기적인 대전환의 분기점이었음이 분명하다.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암흑의 시기에 사람들은 추기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말씀이 있기를 기다렸고, 제 스스로는 말할 자신이 없는 언론은 습관처럼 추기경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시대가 가파르게 힘들고 어려우면, 내게는「추기경 인터뷰」라는 소임이 떨어지곤 하였다. 약속도 없이, 예의도 전혀 없이 내게는 추기경의 귀중한 시간을 기습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다. 결코 쉽게 이끌어 낼 수는 없으나, 어느 때라도 그곳에는 시대고(時代苦)를 위로하는 준비된 말씀이 있었다. 권력과 불의를 질타하는 예언과 경고가 있었다.
기자 초년시절의「거짓말 잘 쓰는 기자」로 언제까지라도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어느 날 추기경께서는 기자가 쓰고 있는 기명 칼럼에 대한 관심을 비추셨다.
『그 자료들은 어떻게 구하지?』
자신이 그 칼럼들의 확실한 독자임을 그런 말씀으로 밝혀주셨던 것이다.
추기경의 말씀에는 누구라도 쉽게 생각함직한 사례와 비유가 풍부하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깊은 통찰이 그 말씀에는 잠류(潛流)한다. 추기경의 현실분석과 정치적 감각에 대해 혀를 두르며 감복하는 정치인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애틀에 도착한 날, 추기경은 그곳 한인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자 추기경은『여러분들이 그냥 돌아가시기 서운할 테니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겠다』고 동포 신자들에게 말했다. 추기경은 자작곡인 듯이 들리는「애모」를 열창했다. 『하느님, 난 당신을 알아요』로 시작해서 『오 하느님, 난 당신을 사랑해요』로 끝나는 긴 노래로 신자들을 울렸다.
추기경의「사랑노래」를 미국 땅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추기경 쫓아다니기」30년의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나 지금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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