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 서철순과 김아가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서상돈은 5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59년 어머니 김아가다와 함께 대구 세방골로 왔다. 그는 대구에서 외가댁과 당시 천주교회 지도자였던 서용서 (김수환 추기경의 외조부) 회장과 또한 당시 보부상의 두령인 최철학 도회장 등 은인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으로 출발해 근검절약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하며 마침내 대구에서 제일가는 거상(巨商)이 됐다. 그 과정에서 1866년 서상돈이 17세가 됐을 때 병인박해를 만나 백부인 서인순을 비롯 서익순, 서내순 등 삼촌 3명이 순교했다.
그는 거상이 된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특히 봄, 겨울의 사순절과 대림절에는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교회사업에도 헌신적이어서 초창기 대구교회와 1911년 대구대목구 설립시 교회를 위해서 많은 헌금과 땅을 헌납했다. 서상돈은 늘상 "나의 재산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오직 천주님의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강직하고 검소하고 안목이 넓은 인물로 우리 교회사업과 자선사업뿐 아니라 애국운동에도 앞장을 서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도 가입, 활발하게 애국 운동을 폈다. 서상돈은 1906년 1월에 김광제와 손을 잡고 '대구광문사'를 창설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의 문회(文會)에서 김광재, 정규옥 등 20여명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이 운동은 정부에서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빚진 1300만원을 전 국민들의 금연(禁煙) 등 근검절약으로 갚겠다는 애국운동.
서상돈은 당시 대구본당(현 계산본당)의 열심한 신자로써 초대 로베르(김보록) 신부를 도와서 1897년과 1902년 대구본당(계산본당) 성전 건립에 크게 공헌했으며, 학교설립을 통한 선교사업과 빈민구제 사업 등에 크게 기여한 교회의 공로자였다.
한편 이 국채보상운동이 반민족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일제의 탄압으로 비록 결실을 맺지 못하고 중단됐지만 신분과 지식의 차별없이 단시간에 일어난 범국민적인 애국운동의 시발이었으며 또한 훗날 일제 때 신분과 지식의 차별이 없는 애국운동의 시초가 됐다. 아울러 이 운동은 최초로 여성들이 단체 또는 개인적으로 참여한 여성애국운동이란 점에 있어서 대단히 뜻있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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